우리집 그리고 그 속의 이야기

살아서도 이산 사후에도 이산의 아픔

心田農夫 2021. 5. 9. 20:22

 

<하늘나라로 선물을 보낼 수 없을까?>라는 글을 어버이날이 어제 올렸다. 어버이날을 맞자 부모님 생각이 많이 난다. 부모님은 이북에서 남쪽으로 피난을 오면서 첫째인 누님을 고향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맡긴 채 두 형님만 데리고 남하하셨다. 계획은 남쪽에 자리를 잡은 후에 누님을 데리고 올 생각이셨으나 38선이 막히면서 누님과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되었다. 혹시나 누군가에 의해 누님이 남하하지 않았을까? 하는 심정으로 KBS 이산가족 찾기에도 나가서 애타는 마음으로 기적을 바라보았지만, 그 기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는 남한에서 태어나 이북의 누님은 남한에 두 동생만 있는 줄 아시고 나의 존재를 모르신다.

 

 

<아버지 산소에 잡초가 무성했다>

 

살아생전에 부모님은 당신들의 죄도 아니건만, 부모님은 늘 누님에게 죄인으로 사셨다. 살아생전 어머님은 걷는 아이를 데리고 왔으면 되는데, 고생을 안 시키려고 했던 것이 이런 생이별을 할 줄이야.”라며 늘 안타까워하셨다. 그렇게 가슴에 멍울을 안고 사셨던 부모님은 이제 이승에 계시지 않는다. 어머님은 예순 중반에, 아버님은 팔십 대에 이 지구를 떠나셨다. 이북인 고향인 우리 종친들은 남한에 정착하면서 용인에 선산을 마련하였다. 남북을 왕래할 수 없으니 이곳에서 사시다 삶은 정리하시는 어른들은 이곳 선산에 모시었다.

 

 

<두 시간 가량 낫으로 벌초를 했다>

 

 

그런데 그 선산 들어가는 길 초입에 농장을 하던 분이 돌아가시고 다른 분이 그 농장을 인수하신 후에 선산으로 올라가는 길을 봉쇄하였다. 어머님은 선산에 모셨는데, 아버님은 선산에 모시지 못하고 내가 거주하는 포항에 모시게 되었다. 즉 어머님은 용인 선산에, 아버님은 포항에 누워계신다. 어제가 어버인 날인데, 부모님이 살아계시지 않으니 어버이날이 나에게 무의미하다. 출근하지 않는 일요일이기에 딸들이 보낸 카네이션 꽃바구니에서 세 송이의 카네이션꽃을 추려 아버지 산소에 다녀왔다. 부모님은 살아계실 때는 첫째 딸과의 이산으로 아픔을 겪으셨고 돌아가신 후에는 용인 선산과 포항에 떨어져 누워계시니 이 또한 이산의 아픔의 고통을 당하고 계신 것이다.

 

<딸이 보내온 곷바구니>

 

 

인간이라면 해서는 안 된 일이 세 가지가 있다는 것을 나는 어머니 생전에 어머님에게 가르침으로 받았다. 첫째, 사람 집에 사람 오는 것을 막는 것 아니다. 때로 그 사람이 피해를 준다고 해도 결코 내 집을 찾는 손님을 막아서는 안 되고 때가 되면 반드시 음식을 대접해서 보내라. 둘째, 사람 다니는 길을 막는 것은 안 된다. 셋째, 물길을 막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종종 뉴스에 보면 사람과 차가 통행하던 길을 개인 땅이라는 명분으로 막는 것을 보기도 하고 농사지을 물을 막았다는 이유로 살인을 한 뉴스를 보기도 한다. 이럴 때 어머님이 가르침이 정말로 얼마나 살아가면서 어떠한 가르침보다 진실하고 소중한 것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휴일이 저무는 이 시간 어머니 아버지가 무척이나 보고 싶은 날이다.

 

 

딸이 보내온 꽃바구니에서 3송이 카네시션 아버지에 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