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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지눌의 돈오점수사상

心田農夫 2007. 11. 24. 19:50

 

지눌의 돈오점수사상

 

강 건 기    전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I. 서언

                  II. 시대적 배경 및 생애
                      1. 시대적 배경

                      2. 지눌의 생애

                  III. 돈오점수 사상
                      1. 돈오점수설의 연원
                      2. 지눌의 돈오점수
                      3. 점수의 내용 :" 정혜쌍수

                      4. 돈오점수를 택하는 이유

                      5. 돈오점수와 경절문

                  IV. 절어

 

 

 

I. 서 언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1158-1210)은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을 스스로 걸었고 또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친절히 그 길을 가리킨 영원한 스승이다. 그러므로 그는 명철한 논리로 철학하고 사색하였지만 단순한 철학을 위한 철학, 사상을 위한 사상이 아니라 실천을 생명으로 안 체험인 이었으며 산 종교인이었다.

 

그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하여 먼저 자기존재의 실상에 눈뜨는 깨침이 앞서야 한다고 하였고 그를 바탕으로 본래적인 생명의 물줄기가 생활 속에 살아 움직여서 모든 존재와 조화로운 공존을 가능케 하는 철저한 닦음이 뒤따라야 한다고 하였다. 즉, 마음에 대한 철저한 깨침과 쉼 없는 닦음이야말로 지눌이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없어서는 안될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깨침과 닦음에 관한 그의 이론이 돈오점수 사상인 것이다.

 

지눌은 모든 사람들이 마음에 즉한 깨침과 닦음에 철저할 때 그것이 바로 화해의 근본이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참 마음의 원천에서만 모든 대립된 이론과 쟁론은 스스로 쉬며 禪·敎의 대립 또한 근원적인 해결이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선이란 그러한 참 마음의 바탕 자체이며 교는 그 마음의 표현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는 평생을 일관하여 수심인(修心人)의 나침반으로 깨침과 닦음에 관한 바르고 명확한 길을 바로잡는 일에 진력하였다. 지눌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돈오점수 사상은 바로 그의 깨침과 닦음에 관한 체계화인 것이다.

 

원래 불교는 깨침의 종교이다. 불타의 모든 교설이 그의 큰 깨침[大覺: Great Enlighten- ment]을 근원으로 하며, 그것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깨침에 이르게 하는 길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불교인의 모든 종교적 노력은 깨침을 향한 것이며 이 노력은 밖으로 무엇을 기구(祈求)하는 것이 아니라 내심을 향한 자력적인 닦음이다. 불교에서 깨침과 닦음이 항상 중요한 이슈로 거론되는 것도 이러한 때문이다. 지눌이 깨침과 닦음을 수심인의 가장 요긴한 일로 삼는 것을 보더라도 이러한 불교 본연의 입장과 다르지 않다.

 

지눌이 한국불교에 미친 영향은 말할 수 없이 깊다. 그의 저술인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와 {계초심학인문}이 지금까지도 한국불교 승려교육의 필수교재로 채택되고 있고 그밖에 그가 중요시하던 경전들이 승려교육의 기본이 되고 있음도 이를 잘 증명한다. 이러한 저술과 경론(經論)들을 통하여 선과 교를 융회(融會)하는 지눌적인 통불교(通佛敎)의 전통은 지금까지도 한국불교에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눌에 대한 평가가 꼭 긍정적이고 일치하는 것만은 아니가. 일반적으로 [독창적인 한국선의 확립자], [통불교사상의 완성자]라는 긍정적인 평가 외에 근래 그를 오해(悟解)가 깊지 못한 [지해종도(知解宗徒)]라는 부정적 평가도 없지 않다. 이러한 비판은 [佛祖源流]에서 그를 산성(散聖)으로 취급한 것과 통하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는 이들 비판의 초점이 바로 지눌의 깨침과 닦음, 즉 돈오점수 사상에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면 퇴옹 이성철 종정은 {禪門正路}에서 ① 돈오(頓悟)는 견성(見性)이며 구경각(究竟覺)이요 성불(成佛)일 뿐 닦음이 더 필요한 깨침은 아니다. ② 따라서 보임(保任)이나 점수란 자재해탈(自在解脫)일 뿐 습기(習氣)를 제거하는 수(修)가 아니다. ③ 그러므로 돈오점수란 이단사설(異端邪說)에 불과하다고 돈오점수 사상을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에 앞서 아무튼 돈오점수에 관한 이러한 엇갈린 견해는 아직도 깨침과 닦음에 관한 문제가 살아있는 이슈임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따라서 깨침과 닦음에 관한 지눌의 지론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일은 중요한 일이라 생각된다. 본 논문이 지눌의 돈오점수를 그 주제로 삼은 것도 이러한 까닭에서이다. 지눌의 돈오점수 사상을 고찰하는 본 논문은 그가 ① 무엇 때문에, 그리고 어떤 입장에서 돈오점수를 주장하였으며, ② 그 내용상의 특성과 의의는 어떠한 것인지를 알아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하여 돈오점수 사상형성의 시대적 배경과 그의 생애, 돈오점수의 내용, 사상적 특성 및 의의의 순서로 고찰하고자 한다.

 

 

II. 시대적 배경 및 생애

 

1. 시대적 배경

 

지눌이 살았던 12세기 고려불교는 내외로 큰 어려움에 봉착하고 있었다. 밖으로는 계속되는 정변의 소용돌이 속에 불교가 함께 휩쓸리어 종교적 기강이 극도로 해이해졌으며 안으로는 선과 교의 대립 갈등 또한 심하였다.

지눌은 의종 12년(1158)부터 희종 6년(1210)까지 4대에 걸쳐 53년의 길지 않은 생애를 살았지만 전 고려사를 통하여 이 기간은 극도의 변란과 불안의 시대로 특징지워진다.

 

예종까지의 융성기를 지나 고려를 변란의 와중으로 몰아넣기 시작한 인종조의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은 지눌이 태어나기 각각 32년, 23년 전의 일이었으며 이러한 변란은 왕권의 쇠퇴를 초래하여 더 큰 환란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의종말 명종초 문신에 대한 반감으로 일어난 정중부, 이의방을 중심한 이른바 무신의 난은 국사의 나이 13세 때의 일이었다. 그 후 계속되는 무신들 간의 권력다툼으로 서로를 모략하고 살육하는 정변의 와중에서 지눌은 성장기의 대부분을 보냈다. 명종 26년 최충헌이 무신 상호간의 투쟁에서 승리하여 강력한 세습정치를 하기는 국사의 나이 38세 때의 일이다.

 

이러한 쿠테타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치 사회적인 질서는 파괴되고 하극상(下剋上)의 풍토 또한 만연되어 각지에서는 민란이 끊일 줄을 몰랐으니 서계(西界)의 민란(명종 2년 1172), 남도(南道)의 민란[명종 6년 1176], 전주 군인관노의 난[명종 12년 1182], 김사미 및 효심의 난[명종 23년 1193], 만적의 난[신종(神宗)원년 1198], 명주 농민의 난[신종 2년 1199], 진주의 노비반란[신종 3년 1200], 동경민란[신종 5년 1202] 등은 모두 지눌이 재세시에 일어난 대표적 민란의 예인 것이다.

 

이런 와중에서 불교는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하는 종교 본연의 위치를 잃어갈 수밖에 없었다. 본래 고려불교는 출발 당시부터 왕실과 밀접한 관계 아래 있었다. 이는 [아(我) 국가의 대업은 정녕 제불의 호위하는 힘에 의지한 것이다. 그런고로 선·교의 사원을 세워 주지(住持)를 차견하여 분수(焚修)케 하고 각기 그 업을 닦게 하라]는 태조 십훈요(十訓要)의 제1조에 잘 나타난다. 이러한 십훈요의 정신이 고려역대 제왕에 그대로 전승되어 불교는 대대로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므로 왕실이 정치적인 혼란 속에 휩쓸릴 때 불교가 초연할 수 없음은 넉넉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변란기를 통하여 승려들의 현실 정치에의 참여는 본분을 넘어 때로는 무력적인 행동을 불사하기도 하였다. 이자겸의 난 때에는 승의장(僧義莊)이 현화사(玄化寺)의 스님 삼백여인을 인솔하여 이자겸의 편에 서서 변란에 직접 참여하였는가 하면 명종 4년에는 왕실파의 입장에 서 있던 승려들이 정중부, 이의방 토벌 운동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이들 승려들의 무력적인 관여를 {고려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듬해에 귀법사(歸法寺) 승(僧) 백여 인이 성의 북문을 범하여 의유승록(宜諭僧錄) 언선(彦宣)을 죽이거늘 의방이 군사 천여 인을 거느리고 수십 승을 쳐죽이니 나머지는 다 산거(散去)하였으나 병졸의 사상자도 역시 많았다. 다음날 중광(重光), 홍호(弘護), 귀법(歸法), 홍화(弘化) 등 제사(諸寺)의 승 이천여인이 성의 동문에 모였는데 성문을 연소시키고 들어가 의방 형제를 죽이고자 하므로 의방이 이를 알고 부병(府兵)을 징집하여 이들을 쫓고 승 백 여명을 베었으나 부병도 역시 죽은 자가 많은지라 부병을 시켜 성문을 분수(分守)케 하고 승의 출입을 금하였다. 의방은 또 부병을 보내어 중광, 홍호, 귀법, 용흥(龍興), 묘지(妙智), 복흥(福興) 등을 불사르다.]

귀법사 승려들이 이의방 토주(討誅)에 앞장섰던 이 사건은 쌍방간의 살상자의 수로 보나 이천여 명의 승려들이 출동한 점으로 보아 당시의 정치적인 변란에 승려들이 얼마나 깊이 관여하고 있었는가를 넉넉히 짐작케 하는 예인 것이다., 이렇게 승려들이 현실정치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리는 가운데 고려불교는 종교적 위치를 크게 벗어나 승려의 기강이 극도로 문란해 질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궁중의 옹호를 받는 불교는 납세의 의무를 면제받는 특혜를 이용 토지와 농노를 겸병하고 노비를 사유하여 각종 식화사업(殖貨事業)을 일삼아 사원을 이굴화(利窟化)하는 폐단도 없지 않았다. 이렇게 당시의 승려들이 세속적 이양의 길에 구구하고 정치적 틈바구니에서 승려의 본분을 잃고 있음을 지눌도 그의 저술 곳곳에서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이 날마다 하는 소행을 돌이켜 보면 어떠한가. 불법을 빙자하여 "나"와 "남"을 구별하여 이양의 길에서 허덕이고 풍진(風塵) 속의 일에 골몰하여 도덕은 닦지 않고 의식(衣食)만 허비하니, 비록 출가하였다 하나 무슨 덕이 있겠는가.…… 나는 오래 전부터 이런 일을 한심스레 여겼다.]

 

이는 당시 고려불교의 타락상에 대한 지눌의 생생한 증언이다.

 

이렇게 궁중불교로 정치적 와중에 휩쓸리고 승려의 기강이 해이되어 정법(正法)과 멀어진 것이 지눌 당시 고려불교가 안고 있는 외적인 문제점이라면 불교 내적으로도 또한 선과 교가 대립 갈등하고 있었으니 이는 고려불교가 안고 있는 또 다른 문제인 것이다. [교 밖에 따로 전하는 것, 문자에 의지하지 않고 각자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 마음의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룬다][敎外別傳 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는 종지를 가진 선이 우리 나라에 처음 전래 된 것은 선덕왕(善德王, 632-646) 때 법랑(法朗)이 사조 도신(道信, 580-651)의 법을 전한 것이 처음이라고 한다. 그 뒤 신행(神行, 703-779)이 신수계(神秀系)의 북종선(北宗禪)을 전하였다고 하나 자세한 자취를 알 수 없다. 한국에 선이 흥륭하기는 9세기초 도의(道義)에 의하여 남종선(南宗禪)이 전래되고 선문을 개창하면서 부터이다. 이때부터 여초 이엄(利嚴, 870-936)이 수미산문을 개창할 때까지 선은 구산선문을 형성하면서 발전하였다. 선이 한국에서 크게 발전하면서 전통적인 교불교와의 경쟁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교가 경전을 근본소의로 하는데 반하여 선불교는 출발부터 교외별전 불립문자를 종지로 하는 상위점 때문이다. 특히 선문구산의 한국선이 지선(智詵)의 희양산문(曦陽山門)을 제외한 거의 모두가 과격한 남종선의 계통임을 우리는 간과할 수 없다.

 

선과 교의 대립 갈등이 선문구산 이래 한국불교의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공민왕 때 진정국사(眞靜國師) 천정(天瓣)이 지은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은 이러한 갈등의 심각성을 잘 전한다. 천장은 그 서문에서 선에 대한 교학자들의 태도를 일컬어 [교학자들이 교외별전이란 말을 들으면 얼굴빛이 달라지면서 "나쁜! 그런 말이 어디 있는가?"라 하여 선을 폄시하였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동서에 소개되는 범일국사(梵日國師)의 진귀조사설(眞歸祖師說)이나 무염(無染)의 무설토론(無舌土論) 등은 교에 대하여 선의 우월성을 내세우는 전형적인 예이다.

 

진귀조사설이란 구산문 도굴산(寐塗山)의 개조인 범일이 진성왕(眞聖王)의 선교에 관한 물음에 답하는 내용으로 석가의 깨침이 미진하여 진귀조사를 찾아가서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으로 그 가르침의 내용이 바로 교외별전의 선지(禪旨)라는 것이다. 이 말대로 하면 진귀조사는 석가의 미진한 깨침을 완성케 한 스승이며 조도(祖道)는 불도(佛道)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설들이 물론 역사적인 사실이 아닌 터무니없는 얘기인 것은 말할 것도 없으나 문제는 그런 설이 날조될 만큼 교에 대하여 선의 우위를 내세워야 하는 풍토를 미루어 선교간의 대립이 얼마나 심각했던가를 알 수 있다. 또 무설토론이란 {보장록}에 의하면 구산선문 중 성주산문(聖住山門)의 개조인 무염의 소설(所說)로서 무설은 불(佛)의 정전(正傳)으로 선이요 유설(有舌)은 불의 응기문(應機門)으로 교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설은 유적(有跡)이요 무설은 무적(無跡)으로 선의 우월성을 들어낸다. 아무튼 이러한 자료들은 모두 선의 우위성을 내세우는 것으로 그간의 선교간의 대립적인 분위기를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지눌보다 백여 년 앞서 출세했던 대각국사 의천이 고민했던 것도 바로 선교간의 갈등을 어떻게 하면 해소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였다. 그가 지적하는 선과 교의 문제점 역시 [교를 공부하는 사람은 내적인 것을 버리고 외적인 것을 구하는 일이 많고 선을 익히는 사람들은 밖의 연경(緣境)을 잊고 내적으로 밝히기를 좋아하는 것]이었다. 의천에 의하면 이러한 태도는 선교가 각기 극단에 치우침이며 편집(偏執)일 뿐 옳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진리란 말을 여인 것이지만 그렇다고 말을 떠난 것도 아니기 때문이요 말을 떠나면 어리석음에 떨어지고 말에 집착하면 혼미(混迷)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천은 선과 교가 내외겸전(內外兼全)해야 된다는 교관병수(敎觀?修)의 불교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의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교간의 대립, 갈등은 지눌 당시에도 여전하였다. 무의자(無衣子) 혜심(慧諶)이 쓴 지눌의 {원돈성불론}과 {간화결의론}을 합본하면서 쓴 발문에는 이러한 사실이 잘 나타난다.

 

[아아, 슬프다. 머지않은 옛[近古]부터 불법이 매우 쇠폐하였다. 혹은 선을 숭상하여 교를 배척하고 혹은 교를 숭상하여 선을 비방하면서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며 교는 선의 그물이요 선은 교의 그물임을 알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드디어는 선교의 두 종이 길이 원수처럼 보게 되고 법의의 두 학문이 도리어 모순의 종이 되어 마침내 무쟁문(無諍門)에 들어가 일관의 도를 밟지 못하였다.]

 

이는 지눌의 저술 곳곳에서 선교의 갈등을 지적하고 있는 것과 궤를 같이 하는 발문이다. 선교간의 대립과 갈등의 해소는 지눌 당시 고려불교가 해결하지 않으면 아니될 하나의 과제였던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지눌 당시 고려불교의 시대적 배경을 고찰하여 보았거니와 지눌은 불교가 외적으로 정치 사회적 혼란 속에 휩쓸리어 본궤를 벗어나 궁중불교와 이양의 길에 떨어지고 내적으로는 선교간의 심한 갈등 속에 헤매는 시대에 살았다. 이런 상황에서 선교를 회통(會通) 시키어 내적인 갈등을 극복하고 정법을 구현하는 일은 당시 고려불교의 시대적 과업이었다. 지눌은 이러한 시대적인 사명을 자각하고 깨침과 닦음의 정도(正道)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흔연히 일어나 한국불교의 일대유신 작업에 헌신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지눌이 이러한 고려불교의 문제를 어떻게 의식하였으며 그 해결을 위해 어떻게 실천하는가를 그의 생애를 통하여 알아볼 필요가 있다.

 

2. 지눌의 생애

 

한 사람의 삶이 어떠하였는가는 그 사람의 죽음의 장면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죽음이란 삶의 총결산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죽음은 그들 삶의 질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불타와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그렇고 예수의 마지막이 또한 그랬다.

 

보조국사 지눌의 생의 마지막 장면 또한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를 잘 보여준다. {불일보조국사비명}에 의하면 그는 타계하던 날 새벽 목욕제계하고 법당에 올라 향을 사루고 큰북을 쳐 송광사내 대중을 법당에 운집시켰다. 그리고는 육환장(六環杖)을 들고 법상(法床)에 올라 제자들과 일문일답으로 자상하게 진리에 대한 대담을 계속하였다. 마지막으로 한 제자가 [옛날에는 유마거사가 병을 보이었고 오늘은 스님께서 병을 보이시니 같습니까 다릅니까.]라고 물었다. 같은가[同] 다른가[別]하는 질문은 선가에서 진리를 시험해 보는 질문이다. 임종이 가까운 스승께 이러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진리의 세계에서만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여기에 대하여 지눌은 육환장을 높히 들어 법상을 세 번 내리친 다음 [일체의 모든 진리가 이 가운데 있느니라]하고는 법상에 앉은 채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이때가 1210년 3월 27일 그의 나이 53세였다. 그의 생의 마지막 장면은 최후의 순간까지 제자들과 진리에 대한 가르침으로 일관하신 불타의 입멸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그는 진리 속에 살다가 진리 속에 간 영원한 스승이다.

 

국사의 휘(諱)는 지눌(知訥)이며 자호(自號)는 목우자(牧牛子)이다. 황해도 서흥군 사람이며 속성은 정(鄭)씨로 국학의 학정(學正)인 광우(光遇)의 아들이다.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는 입멸후 희종으로부터의 시호이다.

 

그의 생애는 41세 때(1198) 지리산 상무주암에서의 깨침을 중심으로 그 이전과 이후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이전의 생애가 고려불교의 타락상에 대한 깊은 인식과 그를 바로잡으려는 정열이 깨침을 향한 줄기찬 정진으로 승화된 기간이었다면 깨침 이후의 삶은 한국불교의 정도(正道)를 모든 사람을 위하여 펼친 자비의 실천기간이었다. 이제 우리는 그의 생애를 이 두 기간으로 나누어 고찰해 보기로 한다.

깨침을 향한 수학(修學)시대 : 국사는 어려서 선문구산의 도굴산계의 종휘선사(宗暉禪師)로부터 축발수계(祝髮受戒) 하였으나 어느 한 종파나 스승에 맹종하기 보다는 진리에 계합하는 이는 모두 스승으로 모시는 종파에 초연한 입장으로 면학하였으니 학무상사 유도지종(學無常師 惟道之從)이란 말은 그에게 가장 걸맞는 표현이다.

 

전기에 의하면 그는 25세에 승선(僧選)에 합격하였다고 한다. 승선이란 승려의 과거제도로 승선의 합격은 바로 출세의 관문이었다. 승선에 합격하면 본사(本寺)의 주지는 물론 경륜이 쌓이면 왕사(王師) 국사(國師)에까지 오를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승선에 합격한 젊은 지눌은 생의 일대전환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즉, 명리를 떠나 산중에 은둔할 것을 굳게 약속한 것이다. 승선합격 직후 참석한 보제사(普濟寺) 담선법회(談禪法會)에서 그는 동료 10여명과 더불어 굳은 결의를 한다.

 

[이 모임이 파하거든 우리는 명리를 버리고 산 속에 들어가 정혜(定慧)를 균등히 닦아 예불하고 운력(運力)하는 데까지 맡은 일을 다하여 인연따라 심성(心性)을 수양하여 한 평생을 구속 없이 지내어 달사(達士)와 진인(眞人)을 따르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이러한 결의는 지눌로 하여금 당시 서울인 개경을 멀리하고 남하하여 깨침을 향한 정진에 몰두하게 된다. 그러면 무엇이 젊은 지눌로 하여금 [명리를 버리고 산 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아니되게 하였을까? 물론 승려의 신분으로 산중에 묻혀 수심(修心)에 전력하는 일이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닐지 모르나 지눌이 강력한 의지로 명리를 버리고 진인달사의 고행(高行)을 동경하기까지는 그 당시 고려불교의 상황을 주목하여 보지 않을 수 없다. 앞에서도 고찰한 바처럼 당시는 정중부의 난 이후 무신간의 권력싸움이 극에 달했을 때이며 그 혼란 속에 승려들이 휩쓸리어 [도덕은 미수(未修)하고 이양의 길에서 허덕이며 세상일에 골목]하던 때였다. 이러한 통찰과 비판이 그로 하여금 정치의 와중인 개경을 등지고 산중으로 향하게 하는 하나의 동기가 충분히 되었음직하다. 그러나 그가 남향하여 산중에서 수심에 전력하는 것은 단순한 은거를 위한 소극적인 은거가 아니라 고려불교를 바로잡아 보려는 적극적인 뜻이 담겨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단순히 산 속에 들어가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결사하고 정혜를 균등히 닦는다]는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기약은 8년 뒤 정혜결사라는 한국불교 초유의 유신운동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명리]에 이끌리어 타락한 고려불교를 정법에 입각한 수심불교로 바로잡아 보려는 젊은 지눌의 종교적인 열정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열정은 바로 깨침을 향한 정진으로 승화되어 갔다.

 

지눌은 남하하여 깨침을 향한 줄기찬 정진에 들어간다. 창평 청원사에서 정진하던 중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읽다가 [진여(眞如)의 자성이 생각을 일으킴에 비록 육근(六根)이 견문각지(見聞覺知)하더라도 만상에 물들지 않고 항상 자재(自在)하다]는 구절에서 깨친 바 있어 기쁨에 넘쳐 불전을 돌며 그 구절을 음미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국사 증입(證入)의 첫걸음이다. 이 체험은 지눌의 구도열을 더욱 굳게 하였다.

 

그 후 명종 15년(1185) 하가산 보문사에 옮겨 [부처님 말씀이 선에 계합]하는 것을 찾기 위해 3년간 대장경을 열람하였다. 선승인 그가 3년간이나 대장경을 열람하였다는 사실은 파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그가 선교의 갈등과 대립의 해소를 위해 얼마나 고뇌하였으며 진지하였는가를 잘 보여준다. 3년간의 대장경 열람이라는 긴 추구 끝에 드디어 그는 선교가 불이(不二)하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이통현 장자의 {화엄론}에서 [관심(觀心)과 사사무애(事事無碍)의 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통하며 관심 하나만의 자내증(自內證)을 통해서도 화엄 전사상을 얻을 수 있다]는 구절에 접하게 된다. 그리하여 불어(佛語)는 불심종(佛心宗)에 계합한다는 확신을 얻고 [세존이 입으로 설한 것이 교요 조사가 마음에 전한 것이 선]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 3년이란 긴 탐구 끝에 얻은 결론은 선교융회(禪敎融會)라는 보조선의 한 특성을 이루는 기본으로서 그의 사상, 나아가서는 한국불교 사상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수행과 탐구를 통한 체험과 확신을 바탕으로 명종 20년(33세)에는 팔공산 거조사에 옮겨 몇몇 동지와 함께 승선후 기약했던 정혜결사를 실천에 옮긴다. 이는 당시의 타락된 고려불교를 일신하여 수심불교로서의 정법을 구현하려는 의지의 실천이며 한국불교 유신의 획기적인 횃불인 것이다. 이 때 발표된 취지문이 {정혜결사문}으로 젊은 지눌의 개혁의 의지에 찬 선언문이다.

 

거조사에서 정혜결사의 기치를 높이 들자 전국 각처에서 동지들이 운집하였다. 그는 [미진된 나에게 이토록 중인들이 모이니 본연을 잊기 쉽겠다]고 느껴 승려 수인과 함께 신종 원년(1198)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일의일발(一衣一鉢)로 정진하였다. 이 상무주암에서의 은거와 정진은 투철한 깨침을 향한 마지막 관문이 된다. {단경}과 통현의 {화엄론}을 통한 두 번에 걸친 종교체험이 있었으나 이때까지 기실 지눌의 깨침은 미진한 바가 없지 않았다. [내가 보문사에서부터 이미 10여 년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 정견(情見)을 버리지 못하여 어떤 물건이 가슴에 걸리어 마치 원수와 함께 있는 것 같았다]는 그의 진술을 통하여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마침내 {대혜보각선사어록(大慧普覺禪師語錄)}을 읽다가 [선정은 고요한 곳에도 있지 않고 또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으며 날마다 반연하여 응하는 곳에도 있지 않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에도 있지 않다. 그러나 먼저 고요한 곳을 버리고 참구하지도 말아야 한다. 만일 갑자기 눈이 열리면 비로소 그것이 집안일임을 알 것이다]하는 구절에 문득 크게 깨치어 [저절로 물건이 가슴에 걸리지 않고 원수도 한자리에 있지 않아 당장에 편하고 즐거워졌다]고 한다.

 

스승으로서의 생애 : 상무주암에서의 깨침은 그의 생애의 분기점이 되었다. 이제 남은 10여 년의 생은 깨침에 즉한 세찬 자비의 실천이 있을 뿐이다. 그는 신종 3년(1200)에 송광사로 옮기어 본격적인 교화에 전력하였다. 거조사에 있던 정혜결사도 그곳으로 옮기어 인근의 같은 이름의 절과 혼동을 피하여 수선사(修禪社)로 바꾸어 독특한 보조선풍을 진작시키니 세인들이 평하여 [禪學之盛 近古莫比]라 하였다. 수선사의 선풍은 정과 혜를 고루 닦으며 교와 선을 함께하는 수심불교(修心佛敎)로 이는 고려불교를 일신하기 위한 국사의 처방이기도 하였다. 즉 타락한 궁중불교에서 수심의 불교로, 선교의 대립, 갈등에서 선교융회로의 원융한 정법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오직 스스로 도에 맡겨 남의 칭찬이나 비방에는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고 그 성품은 인자하고 참을성이 있어 성질이 부랑한 사람이 뜻을 거슬리더라도 잘 지도하였다]고 한다. 사람들에게 읽기를 권할 때에는 언제나 {금강경}으로 하였으며 이치를 연설할 때에는 {육조단경}을 기본으로 하였고 통현의 {화엄론}와 {대혜어록}을 또한 중요하게 여겼다고 한다.

 

지눌의 교화는 그의 종교적 체험을 기본으로 하고 또 듣는 이의 능력과 소질을 중요시하는 특질을 가졌다. 선교를 융회함은 그가 {화엄론}을 통하여 선교가 각기 불심과 불어로 계합하는 것을 친증한 체험을 기본으로 하며 성적등지(惺寂等持), 원돈신해(圓頓信解), 경절(徑截)의 삼문으로 접화(接化)함도 각기 {단경}, {화엄론}, {대혜어록}을 계기로 증입한 체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특히 삼종의 접화문은 듣는 이의 능력과 소질에 따라 각기 다른 길로서 이는 응기설법(應機說法)의 묘용을 잘 나타낸다. 여기에 모든 사람에게 고루 능력에 따라 불음(불음)을 전하는 국사의 큰 자비가 있는 것이다. 그는 오직 깨침과 닦음으로 일관하였고 정과 혜, 선과 교가 일치하는 수심불교로의 한국불교의 방향을 정립하여 독특한 지눌 선풍을 확립하였다.

그가 남긴 중요 저술을 보면 다음과 같다.

上堂錄 一卷(失傳) 看話決疑論 一卷

法語歌頌 一卷(失傳) 眞心直說 一卷

禪覺銘 一卷(失傳) 誡初心學人文 一卷

定慧結社文 一卷 法集別行錄節要?入私記 一卷

修心訣 一卷 華嚴論節要 三卷

圓頓成佛論 一卷

 

 

III. 돈오점수 사상

 

우리는 지눌이 불교가 밖으로 정치적 혼란에 휩쓸리어 본궤를 벗어나 궁중불교와 이양에 떨어지고 안으로는 선·교가 대립, 갈등하는 시대에 살면서 선교를 회통하고 타락된 불교를 일신, 정법을 구현하기 위하여 평생을 일관하여 진력하였음을 보았다.

지눌은 정법의 구현을 위해서는 불교인 모두가 수심에 투철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그러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깨침과 닦음의 선후와 본말을 정확히 밝히는 일이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깨침과 닦음의 바른 길은 수심인에게 나침반과 같이 중요하기 때문이며 그렇게 할 때 선교종의 갈등도 자연히 해소될 수 있겠기 때문이다. 돈오점수 사상은 이러한 입장에서 체계지워진 것이다.

 

1. 돈오점수설의 연원

 

지눌이 깨침과 닦음의 이론으로 선오후수(선오후수)인 돈오점수를 주장하였거니와 돈오점수를 올바로 파악하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돈점이란 말이 어떤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지를 알아 둘 필요가 있다. 깨침과 닦음의 종교인 불교에서는 일찍부터 깨침과 닦음이 시간과 단계를 거치는 점차적인 것인가[漸] 아니면 시간과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頓] 가능한 것인가 하는 논의가 있어왔다. 특히 대승불교에서 그러한 논의가 활발하여 점차적이라고 보는 입장을 점문(漸門) 혹은 점교(漸敎), 바로 가능하다는 입장을 돈문(頓門) 혹은 돈교(頓敎)라고 부른다. 그러나 돈점에 관한 논의는 쓰임에 따라 각기 다르니 그를 대략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부처님의 설법 형식에 의한 구별 : 예를 들면 근기를 초월하여 바로 설하였다는 {화엄경}은 돈, 근기에 맞추어 점차로 설한 {아함}, {방등}, {반야경} 등의 여러 경은 점. ② 사상의 내용에 의한 분류 : 일정한 차례에 따르지 않고 단번에 해탈을 얻는 방법을 말한 것을 돈교, 원칙적으로 차례를 밟아서 해탈케 하는 가르침을 점교. ③ 수행의 과정에 따른 구별 : 사상상의 돈교에 의하여 일시에 깨침을 얻는 것을 돈, 점교에 의하여 수행하여 첨차로 얕은데서 깊은데로 나아가는 것을 점. 이 경우 전자는 수행하는 점차와 경과하는 시간을 말하지 않으나 후자는 그 과정으로 칠현(七賢), 칠성(七聖), 52위(位), 삼아승지겁(三阿僧祗劫) 등을 말한다. ④ 선종에서 깨침을 기준으로 한 분류 : 시간과 차제를 거치지 않고 일시에 바로 깨치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돈, 점차로 차제를 밟아 깨친다고 하는 것이 점.

 

물론 지눌이 논의하는 돈점은 선에서 깨침을 중심으로 논하는 입장, 즉 ④의 입장에서 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면 선에서 돈점설의 배경은 어떠한 것인가? 선에서의 돈점설의 원형은 초조 달마의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즉 이입은 돈오로 사행은 점수로 각기 대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돈점의 논의를 위하여 우리는 {육조단경(六祖壇經)}을 들지 않을 수 없다. {단경}에서의 이른바 [남돈북점(南頓北漸)]이 혜능의 친설인가 하는 의문은 접어두고라도 적어도 거기서 우리는 선에서의 돈점논의의 가장 구체적인 모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남·북종이란 말은 육조 혜능과 그 문하인들이 영남 조계산에서, 또 신수를 북종이라 하였음은 주지의 일이다. 그러나 그들간에는 지역적 차이 이전에 선에 대한 관점의 차이가 현저하였으니 근본적으로 남의 혜능이 돈오를 강조하였다면 북의 신수는 점수를 강조하였다. 혜능의 가풍을 남돈선(南頓禪) 혹은 남돈종(南頓宗), 신수의 가풍을 북점선(北漸禪) 혹은 북점종(北漸宗)이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면 신수와 혜능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이 질문은 바로 점문과 돈문, 점종과 돈종의 근본적인 차이가 무엇일까 하는 질문과 다르지 않다. [육조단경]에는 이들의 차이를 드라마틱한 두 게송을 통하여 표현하고 있다. 즉 오조 홍인이 전법을 하기 위하여 각기 공부한 바를 한 수의 게송으로 보일 것을 요청하였을 때 신수는

 

내 몸은 보리수(身是菩提樹)

내 마음은 명경대(心如明鏡臺)

항상 힘써 닦아(時時勤拂拭)

티끌을 묻게 해서는 안된다(勿使惹塵埃)

고 읊었다.

여기에 대하여 혜능은

보리는 원래 나무가 아니며(菩提本無樹)

명경은 또한 대가 아니다(明鏡亦非臺)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本來無一物)

어디에 티끌이 있을까보냐(何處惹塵埃)

 

고 하였다.

 

이 역사적인 두 게송의 차이는 무엇일까? 신수의 게송에 의하면 사람은 누구나 본래청정하다. 이것을 지키고 잃지 않겠다는 노력이 종교적 실천이며 닦음이다. 몸은 보리수며 마음은 명경대다. 티끌에 더럽히지 않도록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지키고 닦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학이란 악을 짓지 않는 것이요[戒], 뜻을 맑히는 것[定]이며 선을 받들어 행하는 것[慧]이다. 신수에 있어서 마음은 거울과 같다. 따라서 그에게 필요한 것은 그 마음의 거울에 티끌이 묻지 않도록 열심히 털고 닦는 일이다.

 

즉, 그의 선은 [거울 닦는] 작업이며 그것은 [닦음]에 중점이 있다. 이러한 신수선의 입장을 잘 나타내는 것이 돈황문서 중의 하나인 {보리달마남종정시비론}이란 신회(神會)의 저술이다. 이 책은 8세기경 신회가 낙양의 북동에 위치한 대운사에서 북종을 이단으로 물리치며 남종을 선양한 기록으로 북종의 신수의 가르침을 가리켜 [마음을 응집해서 명상하고, 마음을 가라 앉혀서 고요함을 유지하고, 마음을 가다듬어 밖을 제어하고, 마음을 닦아 안으로 깨달음을 구하게]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물론 신회에게 이러한 가르침은 [우자(愚者)의 가르침]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단경} 남돈북점품에서 [마음을 머물러 고요함을 관](住心觀靜)하는 것이라는 북종에 대한 {단경}의 평과 일치하는 것이다.

 

여기에 비하여 혜능의 남종선은 [본래 한 물건도 없다](본래무일물)는 사실에 대한 투철한 인식이요 깨침을 강조할 뿐인 것이다. 그야말로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의 소식이다. 그에 있어서 선은 산란한 마음을 진정시키는 [거울 닦는] 일은 아니다. [마음을 머물러 고요함을 관]하는 것은 선이 아니라 [병]이다. 선은 혜능에 의하면 본래 산란하지 않은 자성에 눈뜨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자성자오(自性自悟)요 돈오돈수(頓悟頓修)며 역무점차(亦無漸次)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돈오돈수 역무점차]란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깨침이란 점차적인 것이 아니라 돈오며 돈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혜능의 삼학은 밖으로 무엇을 닦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성품으로부터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즉 자기의 성품으로부터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 계요 정이며 혜인 것이다. 이는 바로 자성이 일상생활에 밝게 드러나는 일행삼매(一行三昧)요 그러므로 돈수인 것이다. {단경}은 남돈가풍은 대근지인(大根之人)을 위한 수승한 하르침이요 신수의 북점가풍은 소근지인(小根之人)을 위한 열등한 가르침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지금까지 고찰한 남북종의 차이를 정리해 보자.

 

〈표1〉

南 宗[頓]

北 宗[漸]

① 깨침의 강조[頓悟]

② 깨침이란[本來無一物]인 자성에 눈뜸이

며 그것은 돈오이다.

③ 닦음이란 자성의 펼침이며 돈수일 뿐이 다(一行三昧).

④ 自性三學

⑤ 大根之人을 위한 길

⑥ 중국적

① 닦음의 강조[漸修]

② [거울 닦는] 닦음은 점차적인 것이다.

③ 깨침이란 그러한 닦음을 통하여 가능하 다.

④ 隨相三學

⑤ 小根之人을 위한 길

⑥ 인도적

 

아무튼 남북돈점의 기본적인 차이는 각기 돈오과 점수의 강조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선의 돈점 논의는 남북종 간의 많은 논란이 되어 오다가 징관(澄觀, 738-839)과 종밀(宗密, 780-841)에 이르러 이론적으로 체계를 지어 구분하였다. 지눌의 {절요}에는 이들 징관과 종밀의 돈점의 구분에 관하여 자세한 고찰을 하고 있다. 이는 그가 자신의 돈오점수설을 확립하기 전에 기왕에 있어왔던 돈점설을 얼마나 신중히 검토하였는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지눌이 그만큼 깨침과 닦음의 바른 길을 탐구하기 위하여 진지하게 노력하였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지눌에 의하면 징관과 종밀은 각기 7종 혹은 5종의 돈점을 분류하거니와 징관은 깨침[悟]을 닦음[修]에 종속시켜 점의 문을 세웠고 종밀은 닦음을 깨침에 종속기켜 돈의 문을 세웠다고 한다. 따라서 두 사람이 같은 돈오점수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돈·점의 차이가 있음을 지적한다. 즉 징관은 점문의 입장에서 수를 강조하는가 하면 종밀은 돈문의 입장에서 오를 강조하는 돈오점수설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징관과 종밀의 입장을 섭렵한 다음에 지눌은 그들의 돈과 점을 아울러 그 자신의 돈오점수설을 확립하고 있다.

 

2. 지눌의 돈오점수

 

이제 지눌이 지도체계로 수립한 돈오점수의 내용을 알아보자. 먼저 돈오를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돈오란 범부가 미혹했을 때 사대(四大)를 몸이라 하고 망상을 마음이라 하여, 제 성품이 참 법신임을 모르고 자기의 신령스런 앎[靈知]이 참 부처인 줄 알지 못하여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허덕이며 헤매다가 갑자기 선지식의 지시를 받고 바른 길에 들어가 한 생각에 빛을 돌이켜 제 본성을 보면 번뇌 없는 지혜의 본성이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어 모든 부처님과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음을 아나니 그 때문에 돈오라고 한다.]

 

돈오란 [心卽佛]이라는 사실에의 눈뜸이며 자기존재의 실상에 대한 명확한 파악이다. 돈오가 있기 전에 [나]에 대한 인식은 [사대를 몸이라 하고 망상을 마음]이라 하는 잘못된 것이었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의 실상에 대한 미혹이다. 그 존재에 대한 미혹의 결과가 부처를 찾으면서 마음 밖으로 추구하는 이른바 [外求]이다.

 

그러던 것이 선지식의 가르침으로 일념회광(一念廻光)하여 마음을 반조(返照)했을 때 존재의 실상은 밝게 드러난다. 그 드러난 모습은 ① 본래 번뇌가 없으며[本無煩惱] ② 무한한 지혜가 본래부터 갖추어져서 모든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자리라는 것이다. 본래 번뇌가 없다는 사실의 발견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투철한 앎이 없을 때 번뇌는 끊어야 할 대상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돈오는 본래 번뇌란 실체가 없고 따라서 끊어야 할 대상이 있음도 아니라는 사실에의 눈뜸인 것이다. 이 눈뜸은 일념회광으로 비로소 가능하다. 한 생각의 돌이킴으로 하여 견자본성(見自本性)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일념회광과 견자본성은 하나이며 동시이이다. 그러므로 [頓]인 것이다. 지눌은 반조자심(返照自心), 회광반조(廻光返照) 등의 표현을 함께 쓰기도 한다. 일념회광은 단순한 지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의 실상을 확실히 아는 생생한 체험이며 그것은 미(迷)에서 오(悟)로의 질적인 전환을 말한다. [내가 부처]라는 말은 바로 이 때에 터지는 탄성이다.

 

이렇게 자성의 참모습을 분명히 깨쳐 아는 돈오는 수행의 구극이며 완성인가? 지눌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지눌에 의하면 돈오란 불과(佛果)를 증득한 최후의 완성이 아니라 처음으로 마음의 실상에 눈뜨는 체험이며 따라서 완성을 위해서는 점수가 필요하다고 한다. 마음의 성상(性相)을 확실히 아는 것이 구태여 완전한 실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돈오는 수행의 완성이 아니라 참다운 닦음의 출발이며 진정한 의미의 신(信)의 확립인 것이다. 조문의 신은 외적인 불법승 삼보에의 귀의라는 차원을 넘어 심즉불의 확신에 이르러 완성되며 그러기에 이러한 신은 진리를 밖으로 찾는 일의 종식이기도 하다. 이러한 신은 자기존재의 실상에 대한 확실한 눈뜸이 있을 때에 가능한 것이다.

 

점수란 무엇인가?

[점수란 비록 본래의 성품이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으나 오랫동안의 습기(習氣)는 갑자기 버리기 어려우므로 깨달음에 의해 닦아 차츰 공이 이루어져서 성인의 태를 길러 오랜 동안을 지나 성인이 되는 것이므로 점수라 한다. 마치 어린애가 처음 낳을 때 갖추어진 모든 기관이 어른과 다를 것이 없지만 그 힘이 아직 충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제법 세월이 지난 뒤에 비로소 사람이 되는 것과 같다.]

 

깨침은 아는 것이며 닦음은 실천이다. 우리의 본래 성품이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분명히 깨치는 것이 돈오이다. 그러나 그 깨친 것을 그대로 생활 속에 구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닦음의 중요한 문제이다. 지눌에 의하면 깨친 즉시로 행동이 깨침과 일치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그러므로 점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깨친 것과 행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는가? 지눌에 의하면 그것은 우리가 오랫동안 길들어 온 습기(習氣) 때문이라고 한다. 미혹한 채 몸, 입, 생각[身口意]으로 익혀온 습성이 돈오로 일시에 완전히 소멸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친대로 실천할 수 있게 하는 닦음이 필요한 것이다. 돈오가 迷에서 悟로의 전환이라면 점수는 凡에서 聖으로의 실천행이다. 돈오를 통하여 자성을 깨친 사람이 그대로 성인은 아니다. 그는 성인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사람이다. 깨침과 성인의 차이는 理와事, 가능성과 완성의 차이이다. 점수란 바로 이 가능성을 완성으로 구체화하는 과정이며 노력이다. 지눌은 돈오와 점수를 어린 아기와 어른에 비유하고 있다. 어린 아기가 금방 태어났을 때 팔다리며 모든 기관이 어른과 다름없이 다 갖추어 있지만 세월이 가고 자라나야 어른처럼 팔다리를 움직이고 활동할 수 있는 것이다. 돈오가 아기의 탄생이라면 점수는 그 아이가 어른이 되기까지의 성숙이며 개발과정이다. 그러므로 돈오만으로는 모든 수행이 필요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마치 갓난아기가 어른행세를 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지눌은 또 점수의 필요성을 [바람은 그쳤으나 물결은 아직 출렁이고 이치는 나타났으나 망념은 아직도 침노한다]고 인증한다. 바람이 그치는 것은 일시에 될 수 있으나 출렁이는 물결이 자려면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이치로 뿐만이 아니라 침노하는 망념을 대치할 수 있는 실제의 노력도 필요한 것이다. 출렁이는 물결을 재우고 망념을 대치하는 공들임이 다름 아닌 점수인 것이다. 그러나 이 닦음은 망념을 끊으려는 노력이 아니라 지혜로서 닦는 것이다. 망념이 일어나면 바고 그 정체를 비추어 알 수 있는 닦음이 필요하다. 비추는 밝음 앞에서 망념은 본래 공한 성품을 들어낼 수밖에 없다. 경계를 따라 망념이 일적마다 지혜로 비추어 살피는 일을[照察] 꾸준히 계속하여 크게 쉰 완전한 경지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 깨친 후의 점차로 닦는 것이다. 크게 쉰 완전한 경지[大休歇之地]는 무위(無爲)의 경지며 그것은 덜고 또 덜어 나아갈 수 없는 구극을 말한다. 바로 여기서 덜고 또 덜어 쉬는 공부가 오후에 필요한 닦음이다. 지눌은 이 오후의 닦음을 목우행(牧牛行)으로 비유한다. 스스로의 호를 목우자(牧牛子)라 한 것도 그가 소치는 공부인 점수를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가를 가리키는 일이다. 지눌은 이렇게 오후의 닦음을 강조하고 있다. 지금까지 말한 지눌의 깨침과 닦음의 과정을 알기 쉽게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표2〉

 

깨침[頓悟] + 닦음[漸修] = 완성[證] : 佛, 聖人

앎[凡夫] = 佛 + 실천 = 앎과 실천의 일치[智慧와 慈悲]

 

 

3. 점수의 내용 : 정혜쌍수(定慧雙修)

 

지금까지 보아 온 것처럼 지눌에 있어서 닦음은 깨침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므로 그가 말하는 닦음은 항상 깨침을 전제로 하는 오후의 수이다. 그러면 깨친 후의 닦음의 원리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 혹은 정혜등지(定慧等持)이다. 선정(禪定 ; Dhyana)과 지혜(智慧 ; Prajna)는 본래 계, 정, 혜 삼학의 덕목으로 일반적으로 닦아 이루는 것이며 단계적인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계율은 신구의의 삼업을 잘 지키어 방비지악(防非止惡)하는 것이며 선정은 산란한 마음을 한 경계에 머물게 하여 조용하게 하고 지혜는 사물을 사물대로 보는 것이다. 또한 이 셋은 단계적인 것으로 계에 의하여 선정을 얻고 선정에 의하여 지혜를 얻는다고 보았다. 이러한 이해가 삼학의 일반적인 이해이며 {단경}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신수의 북점종이 가르치는 삼학이다. 이러한 삼학은 악을 짓지 않고 선을 닦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며 무엇보다도 마음을 깨끗이 하는 닦음이 필요한 것이다. 마치 거울에 앉은 먼지를 닦아 내듯이 마음의 때를 부지런히 없애는 것이다. 앞에서도 본 것처럼 이것이 신수 북점종의 마음 공부의 요체이다. 지눌은 이러한 삼학을 수상삼학(隨相三學) 혹은 수상정혜(隨相定慧)라고 부른다. 상을 따라 닦기 때문이다.

 

여기에 반하여 지눌은 훨씬 다른 차원의 삼학을 말한다. 그것은 자성삼학(自性三學) 혹은 자성정혜(自性定慧)라 불리는 것으로 지눌은 이렇게 말한다.

[마음에 잘못 없음이 자성계(自性戒)요, 마음에 산란함 없음이 자성정(自性定)이며, 마음에 어리석음 없음이 자성혜(自性慧)이다.]

 

이는 혜능의 말을 인용한 것으로 여기서의 삼학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이며 점차적인 단계가 아니라 동시적인 것이며 하나인 마음 그 자체의 작용이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씩 분리되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닌 것이다. 한마음의 다른 면이기 때문이다. 지눌이 보는 선정과 지혜도 혜능에서처럼 마음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선정과 지혜는 바로 마음의 성상(性相), 즉 공적(空寂)하고 영지(靈知)한 두 바탕이기 때문이다. 선정은 마음의 공적한 본체를 말하며 지혜란 마음의 영지한 작용을 말한다. 따라서 선정과 지혜는 마음의 본체와 작용으로 분리되어질 수 없는 하나인 것이다. 본체가 있으면 작용이 있고 작용이 있으면 본체가 있듯이 선정이 있으면 지혜가 있고 지혜가 있는 곳에 선정 또한 있는 것이다. 분리될 수 없는 한 마음이이 때문이다. 지눌이 말하는 정혜쌍수니 정혜등지니 하는 말은 바로 이러한 마음의 본래 성품을 기본으로 하여 나오는 자연스런 표현인 것이다.

 

삼학에 관한 신수와 혜능, 점문과 돈문의 차이는 지눌의 표현대로 하면 바로 수상삼학과 자성삼학의 차이이다. 전자가 단계적이며 닦음이 있는 유위의 노력이라면 후자는 마음의 본래 모습을 가리킬 뿐이요 무위의 수인 것이다. 지눌은 혜능과 마찬가지로 수상삼학은 열등한 닦음으로 깨침이 없는 점문의 것이라 하고 자성삼학은 깨침이 있은 뒤의 삼학이라고 구분한다. 즉 깨침 이전의 정혜는 정과 혜가 쌍수가 못되고 선후가 있는 닦음이며 깨친 이후라야 비로소 쌍수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닦음은 깨침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그 닦음은 정과 혜가 등지요 쌍수인 닦음이다.

隨相定慧― 漸門의 修 : 有爲有心 : 相을 따르는 禪定과 智慧 : 선정과 지혜가 선후가 있음 : 깨 침을 통하지 않은 닦음.

自性定慧― 頓門의 修 : 無爲無心 : 마음에 卽한 선정과 지혜 :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음 : 깨침 을 통한 닦음.

 

지눌의 오후수인 점수는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자성정혜의 수라야 한다. 그는 돈문의 입장에 서 있고 점수가 오후의 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오후수인 점수에 자성정혜돠 수상정혜를 함께 포용하는 원융성을 보인다. 그 까닭은 각인의 능력과 근기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오후에도 수승한 근기의 사람은 자성정혜로 닦을 것 없는 닦음[無修而修]이 있을 뿐이나 그렇지 못한 열등한 근기의 사람은 오후에도 대치하는 수상문 정혜의 원용을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자성정혜를 닦는 사람은 돈문에서 노력 없는 노력으로 병운쌍적(?運梔寂)하여 자기의 성품을 닦아 스스로 불도를 이루는 사람이다. 수상문 정혜를 닦는 사람은 깨치기 전의 점문의 열등한 근기가 대치하는 노력으로 마음마다 미혹을 끊고 고요함을 취하여 수행을 삼는 사람이다. 이 두 가지 수행은 돈과 점이 각기 다르니 혼동하면 안 된다. 그러나 깨친 후에 닦는 문에 수상문의 대치함을 아울러 논한 것은 점문의 열등한 근기가 닦는 것을 전적으로 취한 것이 아니라 그 방편을 취하여 임시로 쓸 뿐이다. 왜냐하면 돈문에도 근기가 수승한 사람과 근기가 열등한 사람이 있으므로 한가지로 그 닦는 길을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각인의 능력과 근기를 중시하는 것이야말로 지눌의 원융한 자비 방편문으로 원효 이래 통불교적인 전통의 한 특색이기도 하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수상정혜를 닦으며 또 어떤 사람이 자성정혜를 닦을 것인가? 먼저 수상정혜를 닦아야 할 경우를 보자.

 

[그러나 업의 장애는 두텁고 번뇌의 습기는 무거워 관행(觀行)은 약하고 마음은 들떠 무명의 힘은 크고 지혜의 힘은 적어 선악의 경계를 대하여 동요함과 고요함이 서로 엇갈림을 면하지 못하므로 마음이 담담하지 못한 사람은 반연을 잊고 번뇌를 버리는 수행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육근이 대상세계를 거두어 마음이 반연을 따르지 않는 것을 선정이라 하고 마음과 대상이 모두 공하여 비추어 보아도 미혹이 없음을 지혜라 한다. 이것이 비록 수상문의 정혜로써 점문의 하등한 근기의 수행이나 대치함에 있어서는 이들이 없을 수가 없다. 만약 들뜨는 마음이 심하면 먼저 선정으로 이치 그대로 산란함을 거두어 잡아 마음이 반연을 따르지 않고 본래의 고요함에 합하게 하며, 만약 혼침이 더욱 심하면 지혜로써 법을 선택하고 공을 관하고 비추어 보아 미혹이 없게 하여 본래의 지각에 합하게 해야 한다. 선정으로 어지러운 생각을 다스리고 지혜로 아무런 생각이 없는 무기(無記)를 다스려 동요하거나 고요한 상태가 없어지고 대치하는 노력도 없어지면 대상을 대하여도 생각 생각마다 근본으로 돌아가고 반연을 만나도 마음 마음이 합하여 그러한 대로 두 가지를 닦아야 바로소 모든 것을 깨달아 무사인(無事人)이 될 것이다. 만약 이렇게 하면 참으로 선정과 지혜를 고루 가져 밝게 불성을 본 사람이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수상문의 정혜를 닦아야 할 사람은 첫째 번뇌의 업장과 습기가 두텁고 무거운 반면, 관행은 약하고 마음이 가라앉지 못하고 들떠 있는 사람, 둘째 무명은 깊고 지혜는 적어서 선하고 악한 경계를 당하여 마음이 담담하지 못하고 움직이는 사람, 즉 이러한 사람들은 수승한 근기가 못되는 사람으로 반연을 잊고 마음을 쉬는 수상정혜의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열등한 근기의 사람이 수승한 근기인양 모든 노력을 하지 않는 일은 만용이며 과대망상으로 지눌은 특히 이러한 사람을 경계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위한 닦음에 자상한 것이다. 실로 혜능은 돈오돈수(頓悟頓修)로 열등한 근기의 사람을 위한 길을 제시치 않고 있으나 지눌이야말로 혜능의 돈문에 서면서도 열등한 근기의 사람들을 위하여 점문의 닦음까지도 차용하는 방편을 시설하고 있음은 주목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오후(悟後)의 수상문 정혜는 비록 점문의 수행을 차용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오전(悟前)의 단순한 점문의 수행과는 전연 다른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는 어디까지나 돈오후의 닦음인 것이므로 깨침을 즉한 수인 것이다. 그러므로 깨치기 이전의 수와는 달리 자성에 대한 의심이 없는 진수(眞修)이며 단지 점문의 수를 일시적인 방편으로 쓸 뿐인 것이다.

 

[비록 대치하는 공부를 빌려서 잠깐 습기를 다스리지만 이미 마음의 성품이 본래 청정하고 번뇌는 본래 비었음을 깨쳤기 때문에 점문의 열등한 근기의 물들은 수행[汚染修]에 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수행이 깨치기 전에 있으면 비록 잊지 않고 노력하여 생각 생각에 익히고 닦지만 곳곳에 의심을 일으키어 자유롭지 못함이 마치 한 물건이 가슴에 걸려 있는 것 같아서 불안한 모습이 언제나 앞에 나타난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 대치하는 노력이 익으면 몸과 마음과 객관대상이 편안한 것 같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편안하다 하더라도 의심의 뿌리가 끊어지지 않은 것이 마치 돌로 풀을 눌러 놓은 것 같아서 오히려 생사의 세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므로 깨치기 전의 닦음은 참다운 닦음이 아니라고 한다.]

 

깨침 이전의 닦음과 이후의 닦음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지눌에 의하면 깨침 이전의 닦음은 물들은 닦음, 즉 오염수라는 것이다. 오염수란 무엇보다도 깨침이 없으므로 근본적인 의심의 뿌리가 남아 있는 닦음이다. 그러므로 열심히 노력하여 닦지만 곳곳에서 의심에 빠져 자유로울 수 없다고 한다. 깨침은 마음의 근본 바탕을 투철히 보는 것이므로 그럴 때 의심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내가 바로 부처요, 번뇌란 본래 자성이 없는 것임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깨침이 부재할 때 근원적인 의심은 계속 남아 있게 마련이고 이 의심의 뿌리가 남아 있은 채 닦는 것이 오염수이다. 잘못된 [나]라는 생각으로 물들었고 닦는다는 생각으로 물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념(無念) 무심(無心)이 될 수 없고 항상 가슴에 무엇이 걸린 듯 불안한 채로의 닦음이다. 이러한 닦음은 마치 돌로 풀을 누르듯이 기껏해야 임시적인 치유에 불과하며 근본적인 치유가 못된다. 그러므로 지눌은 이런 오염수는 참다운 닦음이 못된다고 힘주어 말하다.

 

그러나 깨친 후의 닦음은 비록 점문의 닦음을 빌려쓰더라도 그것은 깨침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물들지 않은 참다운 닦음[眞修]이다. 비록 산란과 혼침을 대치하는 노력의 방편으로 빌려쓰지만 깨친 뒤의 닦음은 존재의 실상에 대한 깨침이 있으므로 의심이 없고 따라서 [나]라는 생각에도 물들음이 없다. 또한 이러한 닦음은 번뇌의 실체가 본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쳤으므로 번뇌를 끊되 끊음이 없는[無斷而斷] 무위의 닦음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지눌은 오전의 수에 대하여 거의 침묵을 지키고 오후수를 강조하고 있다.

 

지금까지 오후의 닦음에서 열등한 근기의 사람을 위한 수상정혜를 살펴보았거니와 대근지인(大根之人)을 위한 자성정혜란 어떠한 것인가?

[만약 번뇌가 엷고 몸과 마음이 편안하여 선악에 무심하고 여덟 가지 번뇌에도 동요하지 않으며 세 가지 느낌[三受]까지도 빈 사람은 자성정혜를 의지하여 자유롭게 함께 닦으면 천진하여 조작이 없으므로 움직이거나 고요하거나 항상 선정이어서 자연한 이치를 이룰 것이니 어찌 수상문 정혜의 대치하는 방법을 빌리겠는가? 병이 없으면 약을 구하지 않는다.]

 

깨친 후에 ① 번뇌가 엷고 몸과 마음이 편안하여 선악에 무심하며, ② 이로움과 이롭지 못함, 명예와 불명예, 칭찬과 꾸지람, 즐거움과 괴로움 등의 여덟 가지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번뇌에도 동요하지 않고, ③ 괴로움과 즐거움 그리고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 세 가지 느낌에도 마음이 조용한 사람은 수승한 근기로 자성정혜를 닦을 뿐이다. 자성정혜란 본래 마음이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에 일여(一如)한 일행삼매(一行三昧)로 일상생활 그대로가 닦음일 뿐 특별한 시간과 장소, 노력이 필요한 닦음이 아니다. 이것은 바로 혜능이 말하는 돈수며 일행삼매와 다르지 않다. 혜능의 특성이 [頓悟頓修 亦無漸次]로 점문을 세우지 않는 것이라면 지눌의 특성은 오후 수에도 각인의 근기에 따라 적합한 닦음의 길을 제시함에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점수의 두 가지 형태인 수상정혜와 자성정혜, 그리고 어떠한 근기의 사람이 그들 수행을 각기 필요로 하는가를 고찰하여 보았다. 그렇다면 또 한 가지 의문은 과연 지눌이 말하는 점수가 자리행(自利行)에만 그치고 마는가 하는 것이다. 지눌은 오후의 닦음이 결코 자리행 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비를 실천하는 이타행(利他行)을 함께 겸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 오후 점수의 문은 다만 더러움을 닦는 것만이 아니요 다시 만행을 겸해 닦아 자타를 아울러 구제하는 것인데 지금의 참선하는 이들은 모두 "다만 불성만 밝게 보면 이타의 행원(行願)은 저절로 원만히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그러나 목우자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불성을 밝게 본다는 것은 다만 중생과 부처가 평등하고 나와 남의 차별이 없음을 보는 것이니 거기서 다시 자비와 서원의 마음을 내지 않으면 한갓 고요함에만 머물러 있지 않을까 걱정하기 때문이다.…… 화엄론에서도 "지혜의 성품은 다만 고요함이기 때문에 서원으로 지혜를 보호한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깨닫기 전의 미혹한 자리에서는 비록 어떤 서원이 있어도 마음의 힘이 어둡고 약하기 때문에 그 서원을 성취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번 깨달은 뒤에는 차별지로 중생들의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자비와 서원의 마음을 내어 제 힘과 분수를 따라 보살의 도를 행하면 각행(覺行)이 점점 원만해지리니 어찌 기쁘고 유쾌하지 않겠는가.]

여기서 지눌의 오후수가 적정에 떨어지는 안일한 것이 아니라 세찬 이익중생(利益衆生)의 보살행을 겸하는 자타겸제(自他兼濟)의 실천임을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수의 두 가지 수행 즉 휴헐망심(休歇妄心)하는 자리행과 중선(衆善)을 실천하는 이타행을 수심의 정(正)과 조(助)로 함께 겸해야 완성에 이를 수 있음을 {진심직설}에서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오후 이타행은 모든 생명의 괴로움을 함께 나누며 건지려는 자비행이며 이는 대소 모든 근기의 사람에게 두루 통하는 실천이며 닦음이다. 지눌이 보는 닦음을 깨침을 중심으로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다.


〈표3〉

이전의 修 : 점문

깨침

: 돈오 이후 : 돈문의 점수[眞修]

隨相定慧[汚染修]

① 自利行

自性定慧―수승한 근기

隨相定慧―열등한 근기

② 利他行

모든 근기

 


이렇게 볼 때 지눌의 돈오점수는 사실상 단순한 체계가 아니라 대소근기의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융통성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돈오+자성정혜의 수승한 근기의 사람을 위한 체계는 사실상 혜능이 강조하는 돈오돈수와 다름이 없다. 이때의 돈오점수는 돈문이 가장 높은 길이며 따라서 [돈오]는 단순한 해오(解悟)의 경지가 아니라 증오(證悟)의 차원에로까지 승화된다. 반면에 돈오+수상정혜 지도체계는 열등한 근기의 사람을 접화하는 길로서 이때의 점수는 점문의 수행을 가차하고 있으며 따라서 돈오 역시 해오에 가까운 평가를 면할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지눌의 돈오점수에 있어서 돈오를 일괄해서 해오로 규정하는 것은 구체적 내용을 무시한 무리한 평가이다. 이 대목은 지눌의 돈오점수 사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점이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지눌이 {절요}에서 징관과 종밀의 돈점문을 고찰하고 나서 [만일 그 깨침이 철저한 깨침이라면 어찌 점수에 걸리겠으며 또 그 닦음이 진실한 닦음이라면 어찌 돈오를 떠나겠는가? 그러므로 문자를 떠나고 이치를 잡아 이름과 말에 걸리지 않는 것이 중요한 일임을 알아야 하느니라]고 설파한 깊은 뜻을 음미할 수 있어야 한다. 지눌의 돈오점수는 돈문과 점문에 방해되지 않는 융통성을 가졌으며 이는 어디까지나 각기 다른 근기의 사람들을 바른 길로 안내하려는 그의 위인문의 충정에서 체계화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돈오점수라는 문자 자체에 구애되기보다는 중인을 인도하기 위한 그의 산 정신을 파악할 수 있을 때 그의 돈오점수 사상의 진면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4. 돈오점수를 택하는 이유

 

지눌은 깨침과 닦음의 바른 길로 선오후수(先悟後修)의 체계인 돈오점수를 채택하고 그것은 [천성궤철(千聖軌轍)]이라고 까지 강조를 아끼지 않고 있다. 그가 돈오점수를 자신의 지도체계로 채택하고 그토록 강조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를 알아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돈오점수 사상이 무엇을 위한 체계였던가를 밝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지눌은 {절요}에서 이렇게 분명히 하고 있다.

[청컨데 마음을 닦는 여러 선비들은 깊히 생각하고 자세히 살펴보라. 내가 지금 먼저 깨닫고 그 뒤에 닦는[先悟後修] 본말의 이치를 구구히 분별하는 것은 공부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비굴하지도 않고[不自屈] 교만하지도 않아[不自高] 스스로 그 곡절을 환히 보아서 마침내 혼란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초심 공부인으로 하여금 부자굴 부자고 하도록 하기 위하여 깨침과 닦음의 본말을 밝힌다는 것이다. 부자굴 부자고란 무엇을 뜻하는가? 이는 지눌이 {수심결}, {결사문}, {절요}등 주요 저술을 통하여 누누히 지적하고 있는 선·교가의 병통에 대한 그의 처방이다. 먼저 자고란 무엇인가? 이는 스스로를 턱없이 높게 평가하는 것으로 선학자에 있기 쉬운 병이다. 그는 이 병을 이렇게 말한다.

 

[말법시대의 사람들은 다분히 지혜는 깊으나 아직도 온전한 법성의 이치를 깨닫지 못하여 괴로운 윤회를 면하지 못하므로 마음만 내면 곧 허망한 것을 받들고 거짓에 의탁하며, 말을 내면 곧 그 분수에 넘치고 지나 지견이 편고하고 행과 앎이 고르지 못하다. 요즘 선문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흔히 이런 흠이 많아 모두 말하기를 "우리 마음은 본래 깨끗하여 유에도 무에도 속해 있지 않거늘 무엇 때문에 몸을 수고로이 하여 억지로 수행 할 필요가 있겠는가"고 한다. 그러므로 걸림 없이 자유로운 행을 본받아 진정한 수행을 버리고 다만 몸과 입만이 단정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마음 또한 구부러져 전연 깨닫지 못한다.]

 

이는 본래 청정한 마음에 대한 올바른 체험적 파악이 아니라 그저 지적인 알음알이로 참다운 닦음까지를 불필요한 것인양 하는 좋지 않은 병이며 이러한 병은 특히 선학자에 있기 쉬운 자고의 병인 것이다. 지눌은 이런 선학자의 병이야말로 닦음을 무시하는 만용이며 그 폐혜는 스스로를 망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까지도 악영향을 주는 악성의 것이므로 강력한 어조로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이야말로 어쩌다가 조그마한 지견만 생겨도 마치 모든 것을 돈필(頓畢)한 양 닦음을 소홀히 하는 무리들로 지눌이 [가끔 영리한 무리들은 별 힘들이지 않고 이 이치를 깨치고는 쉽다는 생각을 내어 다시 닦지 않는다. 그대로 세월이 가면 전처럼 유랑하여 윤회를 면하지 못한다]고 염려하는 어려운 사람들인 것이다. 이러한 자고의 병에 걸린 선학자에게 지눌은 돈오가 진정한 닦음의 시작일 뿐이라는 오후점수(悟後漸修)의 처방을 내리고 있고 부자고하라고 간곡히 당부한다.

 

반면에 자굴의 병은 교학자에게 있기 쉬운 것으로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 있겠는가]하는 법에 대한 현애심(懸碍心)을 내며 급기야는 퇴굴하고마는 병이다. 자기를 수준 이상으로 과대평가하는 것이 병이라면 수준이하로 과소평가하는 것 또한 큰 병이다. 이것은 자기가 본래부터 갖춘 가능성의 상실이며 따라서 상구보리(上求菩提)라는 불교본연의 이상의 포기인 것이다. 이들에 관하여 지눌은 {절요}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보건데 교학자들이 권교(權敎)의 말에 걸리어 진실과 허망을 따로 따로 집착하므로써 스스로 물러날 마음을 내며 혹은 입으로 "事事無碍"를 말하면서 관행을 닦지 않으며, 제 마음이 깨달아 들어가는 비밀한 법이 있음을 믿지 않고 참선하는 이들의 견성성불이란 말을 들으면 곧 말을 떠난 돈교의 이치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하면서, 그 가운데 뚜렷이 깨달은 본 마음의 불변수연(不變隨緣)과 성상 체용과 안락 부귀가 모두 부처님과 같다는 뜻을 알지 못니 어찌 그들을 지혜있는 사람이라 하겠는가…… 만일 이뜻을 안다면 不自屈 不自高 해야 비로소 뜻을 얻은 마음을 닦는 사람이라 할 것이다.]

 

즉, 이 자굴벙의 근원은 자기비하요 [心卽佛]이란 말에 대한 불신이며 그 결과는 퇴굴이다. 이러한 병에 걸린 교학자를 그는 담마기금(擔麻棄金), 즉 금을 버리고 삼[麻]을 짊어지는 사람에 비유한다. 이러한 사람에게 지눌은 깨침은 모든 사람이 이룰 수 있는 것이라는 돈오의 처방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지눌은 [나는 못났다]하는 자굴심에 떨어진 사람에게 [네가 바로 부처]라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이만하면 됐다]하고 자만심에 찬 사람에게는 수심은 이제부터라는 겸허한 자세를 가르치어 不自屈 不自高 하도록 깨우치고 있다. 돈과 오만을 전부로 아는 선학자에게 점수의 용공(用功)을 권하며 관행을 게을리하는 교학자에게는 마음의 성상을 먼저 분명히 보아야 한다고 권하는 응기설법(應機說法)의 지도체계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지눌이 해결하려고 일생동안 진력한 선과 교의 융회정신이다. 즉 그의 돈오점수는 不自屈 不自高의 원리에 입각하여 각기 교학자와 선학자의 병을 치유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선교간의 갈등을 근원적으로 해소하려 시도하고 있다.


5. 돈오점수와 경절문(徑截門)

 

{불일보조국사비명}에 의하면 지눌은 성적등지(惺寂等持), 원돈신해(圓頓信解), 경절(勁截)의 삼문을 시설하여 중인(衆人)을 제접(提接)하였다고 한다. 이 삼종문을 깨침과 닦음을 기준으로 하여 볼 때 첫 두 문은 돈오점수의 지도체계에 포섭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경절문은 다른 바가 있으니 그 내용은 무엇이며 지금까지 우리가 고찰해온 돈오점수의 체계와는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를 알아보는 일은 돈오점수설을 보다 명확히 파악하기 위해 필요하다.

 

경절문이란 무엇인가? [경절]이란 [바로 질러 간다]는 뜻으로 경절문이란 소위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의 단도직입적인 길을 말한다. 즉 일체의 어로(語路), 의리(義理), 사량 분별의 길을 거치지 않고 직접 마음의 본체에 계합함을 일컫는다. 지눌은 돈오점수를 일반적인 사람들을 위한 깨침과 닦음의 길로 제시하면서도 다시 경절문을 시설하여 특수한 근기의 사람들을 또한 포용하고 있으니 그의 저술 가운데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과 {절요} 등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면 경절문의 특성을 지눌의 말을 통하여 직접 들어보자.

 

[원교(圓敎)에서 십현(十玄)의 무애한 법문을 말한 것은 비록 그것이 부사의(不思議)한 경지에 오른 보살을 두루 보는 진리의 경계이긴 하지만, 오늘의 범부들이 관행하는 문에는 듣고 아는 언어의 길과 이치의 길이 있어서, 분별없는 지혜를 얻지 못하고 모름지기 보고 듣는 것과 이해하고 행하는 과정을 지낸 뒤에야 증득해 들어가니, 증득해 들어가서는 선문의 무념으로 역시 상응하는 바이다. 그래서 논에 이르기를 "먼저 듣고 아는 것으로 믿어 들어가고 다음에 생각없는 마음으로써 계합해서 같게 된다"하였거니와 선문에 바로 뛰어들어 증득해 드는 이는 처음에 이치와 뜻을 듣고 아는 생각을 상대함이 없이 바로 자미 없는 화두를 붙들어 깨달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말 길과 뜻 길의 알음알이로 생각하는 경계가 없으며 또한 보고 듣고 이해하고 수행하는 등의 과정도 없다가 홀연히 화두를 대번에 한번 깨치고 나면 앞에서 말한바와 같은 일심의 법계가 훤하게 뚜렷이 밝아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교의 관행하는 자와 선문의 한번 깨치는 자를 비교하면 교내(敎內)와 교외(敎外)가 뚜렷이 같지 않아서 시간적으로도 더디고 빠름이 또한 다름을 명백히 알 수 있다. 따라서 교외별전의 선문은 교종에 널리 뛰어났거나 얕게 아는 자가 능히 감당할 바가 아니다.]

즉, 여기서 지눌은 두 가지 길을 상론하고 있으니 ① 먼저 듣고 아는 것으로 믿어 들어가고[先以聞慧信入] 다음에 무사(無思)로 계합[後以無思契同]하는 길과, ② 처음부터 이치와 뜻을 듣고 아는 어로, 의로 심식 사유함이 없이 바로 몰자미한 화두를 들어 깨치는 길의 두 가지가 그것이다. 전자가 교가 혹은 인교오심(因敎悟心)하는 관행자를 위한 것으로 교와의 융회를 기본으로 한다면 후자는 경절득입(徑截得入)의 문으로 선의 본지풍광(本地風光)을 향한 그야말로 교외별전하는 길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일은 지눌의 돈오점수의 체계는 전자 즉 인교오심의 관행자를 위한 일반적인 지도체계라는 점이다. 거기에 비해 경절문은 인교오심이 아니라 오히려 인교오심의 약점인 지해(知解)의 병을 파하기 위한 직접적인 길로써 시설하고 있으니 이는 선종이 과량지기(過量之機)를 위한 화두선이다. 이 단도직입적인 경절문의 시설이야말로 선이 교를 바탕으로한 융선(融禪)의 입장뿐만 아니라 본분종사(本分宗師)의 면목 또한 잃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


 

 

IV. 결 어

 

지금까지 우리는 지눌의 돈오점수 사상의 내용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고찰하여 보았다. 이제 지금까지 살펴 본 바를 바탕으로 돈오점수 사상의 특성을 정리하여 보고 한국불교 사상사적 의의는 어떠한 것인지를 알아보는 것으로 결어에 대신 하려고 한다.

 

먼저 선오후수의 지도체계인 돈오점수는 묘합회통이라는 구조적인 특성을 가진다. 각기 다른 전통이나 흐름에 대하여 배타적이거나 획일적이기보다 조화로운 만남을 통하여 종합하고 있다. 이것은 신라의 원효가 여러 갈래의 불교를 무리 없이 회통, 하나로 통하게 한 한국불교의 통불교적 전통이라 할 것이다. 그러면 돈오점수 사상에 나타난 묘합회통의 구체적인 내용은 어떠한 것인가?

 

첫째 돈문과 점문의 원융한 회통이다. 깨침을 강조하는 돈문과 닦음을 강조하는 점문은 {단경}이래 대립적인 위치에 있었다. [진리를 연설할 때에는 반드시 {육조단경}에 뜻을 두었다][立法演義則意必六祖壇經]는 지눌은 혜능과 같이 돈문의 입장에 섰다. 이는 그가 창평 청원사에서 증입의 첫 종교적 체험을 {단경}을 통하여 한 것과 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혜능이 돈오돈수, 역무점차를 내세워 점문을 용납하지 않은 것과는 달리 점문의 닦음을 오후수의 방편으로 포용하고 있음은 특기할만한 일이다. 이러한 지눌의 입장은 징관과 종밀의 돈점설을 수용하면서도 독자적인 비판과 주체적인 자세를 잃지 않은 점을 통하여도 그대로 나타난다.

 

둘째 오와 수의 묘합이다. 돈점이 각기 대립, 분리될 때의 문제는 오와 수의 유리이다. 그러나 지눌에 있어서 오와 수는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오를 통한 수, 수를 게을리 하지 않는 오의 체계가 바로 돈오점수의 묘합이며 회통인 것이다.

 

셋째 선과 교의 융회요 묘합이다. 지눌에 있어서 [교는 불어요 선은 불심]으로 선교는 대립, 갈등이 아니라 표리를 이루는 입장이다. 그러므로 돈오점수는 선학자의 문제와 교학자의 문제를 함께 해소시키는 역할을 훌륭히 담당하는 체계이다. 즉 돈오를 강조하면서 열등감으로 관행을 게을리 하는 교학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 점수를 강조하면서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자고병에 떨어진 선학자의 병을 근원적으로 치유하는 처방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로 이러한 묘합회통을 기본으로 하는 돈오점수 사상의 근저에는 모든 사람의 능력과 소질을 최대한으로 살리려는 국사의 근기설법의 자비가 흐르고 있다. 오후수에서 각기 능력에 따라 수상, 자성의 두 가지 정혜를 시설하는 것이나 삼종문을 열어 과량기(過量機)의 선학자에게 단도직입의 경절문을 권하는 것도 위인문(爲人門)의 자비심어린 방편의 소산이라 할 것이다. {단경}의 혜능이 대근지인을 위한 돈문의 길만을 내세웠다면 대근지인은 물론이요 소근지인까지도 버리지 않는 원융한 위인문을 시설한 것이 지눌이었다. 자성정혜문이나 경절문에서부터 점문열기(漸門劣機)의 수인 수상정혜까지를 시설하고 있음은 생각할 수 있는 최상의 근기에서부터 최하근기이 사람까지를 포용하고 있는 지눌의 폭 넓은 수기설법(隨機說法)의 가르침을 잘 보여준다. 이는 대소승의 모든 근기의 중생들을 위하여 각기 다른 입문과 수행의 길을 제시한 불타 본연의 가르침의 방법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요즈음 지눌의 돈오돈수설에 대한 비판을 볼 때 과연 이렇게 중인의 근기를 존중하는 그의 가르침의 입장을 얼마나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지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서언에서도 잠깐 언급한 것처럼 돈오점수를 주장하는 사람을 일률적으로 불타의 혜명을 단절하는 자로 몰아부침은 성급한 판단이 아닐 수 없다. {선문정로}에서 이성철 종정이 밝히는 이른바 선문의 정로는 ① 돈오=견성=구경성불, ② 오후수란 따라서 자재해탈의 경지일 뿐이며, ③ 견성의 방법은 화두의 참구라고 하고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돈오후에 점수가 필요하다는 돈오점수는 이단사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눌의 깨침과 닦음의 체계로 볼 때 성철 종정의 입장은 경절문이나 자성정혜와 다를 것이 없고 그 점 {단경}의 돈오돈수적 견해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미 고찰한 것을 통하여 볼 때 지눌은 그러한 순선적(純禪的) 입장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별도의 문으로 잘 살리면서 또한 열등한 근기의 사람을 위한 방편의 문을 넓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눌의 돈오점수에 대한 평가는 그가 돈오점수라는 지도체계를 수립하게 되는 고려불교의 역사적인 배경과 지눌의 깨침과 닦음에 관한 입장에 대해 구체적이고도 심도있는 통찰이 있은 연후에 내려질 성질의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상의 특성을 가진 돈오점수 사상의 한국불교사상사적 의의는 어떠한 것일까? 첫째 탈중국적인 한국선 전통의 확립이다. 선과 교, 돈과 점, 오와 수를 하나로 보는 회통적 선전통이 비로소 그에 의하여 이 땅에 수립된 것이다. 이는 외래사상의 주체적이고도 독창적인 수요의 한 훌륭한 예이다. 이러한 지눌의 회통적 전통은 원효이래 한국불교가 가꾸고 꽃피워 온 전통의 재확인이며 지금까지도 면면히 계승되어 살아 숨쉬고 있다. 둘째 돈오점수의 체계야말로 지눌이 타락된 고려불교를 정법불교로 바로잡기 위한 방법의 제시로 깨침과 닦음이라는 불교 본연의 이슈에 착안, 수심의 본말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일이다. 셋째 수심인의 나침반으로서 돈오점수는 결국 가장 인간답게 살기 위한 길에 대한 명쾌한 제시이다. 진리가 먼 곳이 아니라 각인의 존재의 원천에 있으며 그 원천으로 돌이킴을 통한 눈뜸과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공존할 수 있는 삶의 길을 지눌은 수심의 길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준다. 오후수에서 모든 사람을 위한 이타행을 강조하고 있음도 바로 이러한 점을 보여주고 있다.

 

지눌은 고려불교가 안으로 선교간의 심한 대립, 갈등과 밖으로 정치적 혼란의 와중에서 형식화하는 시대에 살았다. 그의 생애는 이러한 고려불교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정법을 구현하려는 그의 의지를 잘 보여준다. 그는 정법을 바로 세우기 위하여 깨침과 닦음의 본말을 밝히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실로 그의 삶 자체가 그대로 깨침과 닦음을 향한 것이었다.

 

깨침과 닦음의 정로를 밝히기 위하여 그는 선사이면서도 그 당시까지의 모든 이론을 섭렵하였다. 그러나 그는 유도지종(惟道之從)하였을 뿐 어느 한 사를 맹종하자 않았다. 조계를 따르면서도 점수를 버리지 않았고 규봉종밀을 가까이 하면서도 대혜를 좋아하였으며 그러면서도 교를 멀리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지해종도임을 알면서도 신회의 오해(悟解) 고명함을 높이 평가하였고 정통과 거리가 먼 이통현의 {화엄론}을 남달리 귀하게 여겼다. 이는 다 사람을 쫓는 것이 아니라 법을 따를 뿐인 그의 진실됨을 말하는 것이다. 창조적 전통의 형성은 이러한 주체적인 자세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의 돈오점수 사상은 탈중국적인 한국선의 방향제시였으며 동시에 타락된 고려불교를 일신하려는 그의 처방이기도 하였다. 돈오점수에서 우리는 독특한 지눌 사상 내지는 지도체계의 모습을 볼 수 있으니 선의 입장을 취하면서도 교를 버리지 않고 돈문에 서면서도 점문을 포용하며, 오를 강조하면서도 수를 게을리 하지 않는 묘합회통의 정신이 그것이다. 이 묘합회통정신의 근저에는 각기 다른 근기의 사람들을 능력과 소질에 따라 제도하려는 이익중생의 자비가 살아 있음을 잘 볼 수 있다.

 

출처 : 목련꽃이 질때
글쓴이 : 어린왕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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