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그리고 그 속의 이야기

오월에 기도

心田農夫 2007. 5. 1. 18:02
 

오월에 기도


내 출근하는 길

소티재 고개에  봄이 오면

길가 양쪽 옆으로 개나리가

노란얼굴을 내밀며 웃음을 선사한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앙상한 가지는

꼭 생명이 다한 것만 같은 가지였었는데

빨리 봄소식 전하고 싶은 마음에서 일까?


잎 나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노란 꽃망울을 부터 터트리고는 한다.


소티재 고개

노란 색의 개나리꽃이 줄지어 피어나면

봄이 왔구나, 생각을 했는데


올해는 그 짙은 노란색도

별반 느끼지를 못하고 이 봄을 보내고 말았다.


집 앞 도로가 거리양옆에

줄지어 서있는 가로수 벚나무는 

봄이면 그 꽃을 피워 아름다운 자태로 


오고갈 때마다 운전자인 나에게

봄의 신비로움과 함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고는 했는데

 

이 역시 이번 봄에는

그 아름다운 벚꽃의 자태도

재대로 한번 느껴보지를 못하고 지냈다.


어제 혈압 약을 타기위해

처방전을 받으러 병원으로 가던 중 

길모퉁이에 피어있는 민들레가 눈에 띄었다.


아, 봄이 왔구나. 했는데,


오늘 출근을 하다 보니,

집 앞 가로수의 벚나무들은 꽃은 아니 보이고

벌써 연두 빛의 잎이 제법 무성히 자랐고

소티재의 노오란 개나리도 보이지를 않았다.


눈을 감고 다닌 것도 아닌데

관심을 어디에 갖고 있는가에 따라서

역시 눈에 비추이는 것도 다른가 보다.

아니 눈에 비추이긴 해겠지만 느끼지를 못했던 것이리라.


그 누군가 말했지

사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나의 인생에서

사월을 정말 잔인하고 짓궂게 굴었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그 어느 해인가

사월의 어느 새벽녘에 울렸던

그 전화의 벨소리를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를 못한다. 


지구의 반대쪽

멀고먼 외국에서 걸려온 그 전화.

전화를 받다가 수화기를 떨어트리며

비명에 가까웠던 한마디

“그럴 수는 없다” 하시던 아버지의 그 모습이

지금도 방금 전인 듯 생생하기만 합니다.


삼형제 중에도 너무도 사랑하던

둘째아들을 잃고는 투병 중이셨던

어머니도 너무도 가슴 아파하시더니

결국은 병마를 이기지 못하시고

육 개월 뒤에 형님을 따라 멀리 가셨다.


그 충격으로 잘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쓰고는 무작정 방황을 시작했고

근 일 년여의 시간을 정처 없이 떠돌이 생활을 했었다.


그것이 고향을 떠나게 했던 일이고

그렇게 떠난 고향을 이제는 가기가 싶지가 않다.


객지를 제2의 고향삼아 살면서

이제는 아련히 뇌리의 한 구석에 접어두고

살아 왔었는데,


가슴 저 밑에 저며져있던 그 아픔을

잔인한 사월은 올해에 다시 상기 시켜준다.


아버지마저 그 사월이 생각이 나셔서일까?

이 자식에게 풀어야 할 숙제를 남기신채 떠나 가셨다.


어제로 

이 가슴에  쓰리고 아픈 상체기를

다시 한 가닥 남긴 채

사월은 영원의 세계로 가버렸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오월의 첫날

작은 바램을 가져본다.


아버지가 주시고 간 숙제가 풀리기를,

무릎 끊고 두 손 다소곳이 모아 간절한 마음 담아

기원을 하면서 조심스럽게 오월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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