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살아가는이야기

한줄기의 비

心田農夫 2013. 8. 24. 14:04

 

우정(amicitia)이란 말은 사랑(amor)에서 파생돠었네, 사랑이란 이해관계를 떠나 성의를 맺어주는 것 아닌가.

 

                                                                                        키케로의 『우정에 관하여』중에서

 

 

 

 

 

기다리고 기다리던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강렬히 내려 쬐는 팔월의 태양이 그렇게도 원망스러운 때도 예전에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작물이 타들어가는 것만이 아니라. 심지어는 그 생명력이 끈질기다는 길가의 잡초들도 갈증을 견디다 못해 잎들이 흐늘흐늘 흐느적거리는 팔월의 나날이었습니다.

 

단비, 정말, 단비였습니다. 조금 더 왔으면 하는 마음이지만, 막막한 사막에서 마주한 오아시스처럼, 멀리서 찾아온 친구인양 반갑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의 비였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불현듯 고향생각과 고향친구들 생각이 나면서 얼마 전에 읽었던 책의 구절이 생각이 납니다.

 

 

 

 

 

 

어디선가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한 친구가 항암 치료를 받느라 머리카락이 다 빠졌습니다. 그러자 그의 친구들이 모두 머리카락을 다 밀고 그를 찾아갔습니다.

 

머리카락이 빠진 친구에게 가발을 사주는 일은 어쩌면 모발이 없는 게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보다는 모두 함께 머리카락을 밀고 아픈 친구의 모습과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감동이며 힘이 되는 위로입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고, 지금의 당신 모습 그대로 멋지다고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봉희의 『내 마음을 만지다』중에서

 

 

 

 

 

 

객지생활의 삶이 삭막해질수록 고향생각이 간절하고 그곳에서 함께 했던 고향친구들이 한없이 그리워집니다. 항암치료로 인하여 머리카락이 빠진 친구에게 가발을 사준다는 것만으로도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을 터인데,

 

자신의 머리를 밀고 아파하는 친구, 항암치료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친구를 배려하는 마음이 진정한 우정이 아닐까요? 그리고 아마 그들은 고향 친구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대지가 목마르고, 작물이, 잡초까지 목말라 할 때 내린 단비, 그것은 대지, 작물, 잡초에게는 친구요, 친구의 아름다운 우정이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은 나만이 아니었나봅니다. 전라도에 계시는 수필가 이 명화선생님이 오랜만에 전화로 “선생님, 비가 와서 기쁜 마음에 전화했어요.”하시며 비 소식을 전하십니다.

 

 

 

 

 

 

친구란 우리가 의지 할 수 있고 우리에게 의지해올 수 있는 존재여야 한다. 믿음과 상호성은 완전한 우정이 되기 위한 두 가지 필수 요소이다.

 

믿음, 우리는 친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상호성, 우리는 친구에게 호의를 받으면 그만큼 호의를 베풀려 한다.

 

우정을 배신한다는 건 그래서 대부분 믿음이나 상호성을 배신하는 일이다.

               프랑수아 를로르의 『꾸뻬 씨의 우정 여행』중에서

 

 

 

 

 

 

나의 인생에 주어졌던 또 하루의 해가 영원히 지고 있습니다. 철없던 십대 때, 어울려 놀던 동무가 그리운 저녁입니다. 지금쯤 어디에서 어떻게들 살고 있을까? 그리운 동무들의 소식이 이 저녁 몹시도 그립기만 합니다.

 

시골이 고향이라면, 그래도 고향에 찾아가면 친구들의 소식을 들을 수도 있으련만, 도시가 고향이라 개발이란 이름으로 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고향은 주소조차 바뀌었고 고향의 옛 모습은 흔적조차 없어지고 새로운 도시로의 탈바꿈을 한지 오래되었습니다. 거기다 객지생활 삼십 여년에 근근이 이어오던 친구들의 소식조차 끊긴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오늘 내렸던 한줄기 비, 오래된 친구를 만나듯 반가운 단비요, 어렸을 때 놀던 고향의 동무들을 그리워하게 하는 그리움의 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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