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살아가는이야기

그들은 지금 다 어디에 있더란 말인가?

心田農夫 2013. 11. 26. 11:40

 

역사란 무엇이뇨? 인류 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며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 활동의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게 인류의 그리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사라면 조선 민족의 그리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니라.

            신채호의 『초선상고사』「총론」중에서

 

 

 

 

깊어가는 가을 일품명가 고즈넉한 정원에서 있었던 음악회. 평소에 듣기 쉽지 않던 우리의 전통악기 대금의 선율과 우리전통 음악 판소리의 한 대목을 명창의 창으로 들으면서 우리 음악의 새로움 면을 보게 되었고 우리 것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관객의 힘찬 박수와 앵콜, 앵콜하는 소리에 남도 명창께서 다함께 하자며 선택한 곡은 아리랑이었습니다. 보통 아리랑 하면 슬픔가락이라고 생각을 하였는데, 명창의 재치 있는 가사의 가락을 듣고 따라 하다 보니 평소에 느꼈던 아리랑하면 슬픈 노래라고 생각했던 선입감이 잘못됨을 알게 되었습니다.

 

 

                                                                   <음악에 흠뻑 빠져든 선원탐방 관객들>

 

앵콜곡이라 그런지 명창께서 재미있는 가사로 이야기 하듯 창을 하셨는데, “길에서는 오빠 동생 하더니, 물레방앗간에서 여보 당신 하네.” 가사가 재미있고 명창의 재치에 모든 사람들이 한바탕 웃으며 다함께“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낫네,” 후렴을 합창하였습니다. 아쉬움 속에 흥겨운 가락의 울림을 마음에 담고 다시 버스에 올라 다음 목적지인 남계서원으로 향했습니다.

 

 

                                                    <대금 연주가 끝나고 신라 문화원장님의 남도 명창소개 합니다>

 

 

 

 

 

남계서원(灆溪書院)은 조선시대 두 번째로 설립된 서원으로 일두 정여창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그를 추모하기 위해서 이 고을의 유생 개암 강익 선생을 중심으로 30명의 선비들이 합심하여 1552년 명종 7년 남계에 건립하였답니다.

 

 

 

 

 

남계서원(灆溪書院)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586번지에 자리하고 있고 2009년 5월 26일 국가지정문화제 사적 제499호로 지정되었고, 10동의 고가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사당에는 조선조 5현 중에 한분인 문헌공 일두 정여창. 개암 강익, 동계 전원 선생을 모시고 매월 2월과 8월에 향사를 지낸다고 합니다.

 

 

 

 

조선5현이라 함은 모두 유학을 발전시킨 학자로서, 한훤당 김굉필ㆍ일두 정여창ㆍ정암 조광조ㆍ회재 이언적ㆍ퇴계 이황을 조선의 5현이라 합니다.

 

 

 

 

남계서원에는 직접 당직하는 분이 있어서 해설사에게 듣지 못했던 내용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기숙사와 조금은 다르지만 선비들이 먼 곳에서 왔기 때문에 머물렀던 동재 애련헌과 마주한 서재 영매헌에 대한 설명,

 

 

 

 

선비들이 강당에 모여 학문적 토론에 대하여서도 들었고 결국 그 토론은 당쟁으로 이어졌고 학문적 라이벌 인 남명 조식선생과 퇴계 이황 선생의 학문적 대립에 관한 이야기 들을 수 있었습니다.

 

 

                                                         <개평마을 어느 한옥의 출입문 쪽에 있는 장독들>

 

남계서원을 끝으로 오늘의 서원탐방의 모든 일정을 마쳤습니다. 돌아오는 버스에 몸을 실고 지나는 차장 너머의 풍경을 보면서 생각해 봅니다. 도동서원 앞 400년의 은행나무보다도 짧디. 짧은 인생인데, 권력을 잡고 권력을 맛을 본들 얼마나 볼 것이며, 부귀영화를 누린들 얼마나 누릴 것인가.

 

 

 

 

유한 것이 인생인데, 정권을 잡기 위해 1498년 유자광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가 신진 선비들을 탄압하기 위해 일으킨 무오사화, 연산군이 폐위된 자신의 어머니 윤시를 복원시키려는 것을 반대한 신하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갑자사화,

 

 

 

 

궁중의 나뭇잎에 꿀물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고 글을 써 놓고 벌레가 나뭇잎을 갉아먹게 하여 그 나뭇잎을 임금에게 가져다 보이며 ‘주(走)’와 ‘초(肖)’를 합치면 ‘조(趙)’가 되니 이는 ‘조광조가 왕이 된다.’는 것이라며 모함을 하여 조광조를 유배시키고 사약으로 죽게 하였던 기묘사화 등등,

 

 

                                                                             <남계서원 전경>

 

 

당파싸움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았던 사화들, 그 사화를 일으킨 주인공들은 그리고 권력을 잡고 일진광풍을 권력의 바람을 일으키며 부귀영화를 누렸던 그들은 지금 다 어디에 있더란 말인가?

 

 

                             <남계서원 강당, 보통 서원의 강당은 다섯 칸인데 비해 네칸이라 사액 현판이 나누어 져있다.>

 

 

조광조는 사약을 받아 놓고 절명시를 남겼다지요.

 

임금님 사랑하길 어버이 사랑하듯

나랏일 걱정하길 집안 일 걱정하듯

하늘의 밝은 해가 이 땅을 굽어보니

나의 참 마음을 밝게 밝게 비추리라.

                      조광조의 절명시

 

 

                                                           <기둥을 좌우로 나누어 져 있는 사액 현판>

 

에드워드 H 카가 그의 책『역사란 무엇인가』에서 말합니다. “역사란 역사가와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고,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역사로부터 배운다는 것은 결코 일반적인 과정일 수 없다. 과거에 비추어 현재를 배운다는 것은 또한 현재에 비추어 과거를 배우는 것이기도 하다. 역사의 기능은 과거와 현재의 상호관계를 통해 양자를 더 깊이 이해시키는 데 있는 것이다.

                에드워드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중에서

 

 

 

 

이번 서원탐방에서 마음에 담았던 것은 과거의 우리 선조들의 삶에서 현재 우리의 삶을 재조명해 보고자 했습니다. 어쩌면 세월의 간격으로 떨어져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저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지금의 기숙사 비슷한 용도였다는 동재 애련헌의 모습. 서재 영매헌과  마주하고 있다>

 

                           <지금의 기숙사 비슷한 용도였다는 동재 애련헌 맞으편에 자리한 서재 영매헌의 모습>

 

 

과거가 없었다면 현재가 존재 할 수 없고 현재가 없다면 미래도 도래하지 않겠지요. 과거의 선비들의 사상의 발자취를 따라 걸었던 서원탐방, 선조들이 남기고 간 삶의 체취에서 오늘의 우리들의 삶을 되새겨 보게 된 서원탐방을 마치며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인간의 욕망의 그 끝은 어디인가?

 

 

                     <서원의 맨 뒤 산등성에 위치한  사당으로 일두 정영창. 개암 강익, 동계 전원 선생이 모셔져 있다>

 

                                    <탐방을 마치고 함께 출발 하였던 분들과 기념촬영한 모습, 빠진 분이 더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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