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살아가는이야기

너 없이도 살 수 있어, 나는 나 일 뿐이야

心田農夫 2013. 12. 12. 11:54

 

 

 

모든 성인의 가르침은 남을 도우라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남에게 베푸는 것이 가장 으뜸가는 바라밀이라고 합니다. 바라밀이란 ‘도달한다.’는 뜻입니다.

 

남이란 누구인가? 타인인 아닙니다. 남이란 내 분신입니다. 나와 무연한 타인이 아닙니다. 열린 마음으로 보면 모두가 하나이고 겹겹으로 닫친 마음으로 보면 모두가 타인입니다.

 

     법정스님『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중에서

 

 

 

 

며칠 전 딸아이 대학입학 면접시험이 있어 서울을 다녀왔다. 서울에서 이동교통수단으로는 주로 지하철을 이용하였는데, 지하철 안의 풍경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음을 볼 수 있었다.

 

예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신문을 보거나 책을 보는 사람들을 제법 있었는데, 삼일 동안 갈아타면서 12번을 이용하며 이동하였던 지하철 안에서 책을 읽는 분을 딱 두 번 보았을 뿐이다.

 

 

 

 

전에는 신문을 보시는 분들, 책을 보시는 분들이 많았었고, 지하철 객차 안 선반에는 신문을 보고 난 후 선반에 올려놓은 신문들이 많이 있어서 선반에서 내려 보며 목적지를 가고는 했었는데, 이번에 보니 선반에는 간간히 올려져있는 가방뿐이지 단 하나의 신문이 올려 져 있는 것을 볼 수 없었다.

 

책이나 신문을 보던 모습이 사라지고 다른 모습이 보였는데, 젊은 사람이나 나이든 어른신들이나 한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한 손으로 화면을 터치하는 분, 두 손으로 열심히 문자를 보내는 분, 모니터를 보면서 리시버를 귀에 꼽고는 무엇인가 열심히 듣는 분,

 

 

 

 

저마다들 저만의 세계에 몰입해 있었다. 그래서 일까?

 

어린 두 딸과 함께 탄 어머니가 이제 한 여섯 살 정도의 작은 아이가 “엄마 나 다리아파” 하는 소리를 하는데도, 어느 누구 하나 여기 앉으라고 일어서는 사람이 없었다. 단지 그 엄마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 “조금만 참아, 조금만 가면 돼”하는 말로 어린 딸을 달래고 있었다.

 

다음날 다시 지하철에서 한참을 가다 자리가 나서 앉아 두 정거장을 가다 보니 70대로 보이는 부부가 타셨다. 일어나 자리를 양보하니 한사코 괜찮다고 하시다가 “젊은 사람이 양보를 해야지” 하시며 “미안해요.”하시며 앉으신다.

 

 

 

 

예전에는 버스 안에서나 지하철 안에서나 어린 아이들이나 나이 드신 어른들이 타면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양보하고 양보한 사람이 짐이 있으면 자리를 양보 받아 앉으신 어른들이 무릎에 짐을 받아주셨는데,

 

단 며칠뿐인 서울생활이었지만, 단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요. 인간은 공동체 안에서 ‘나와 너’가 함께 살아가는 것인데, 이제는 그 공동체 안에서, 함께 가 아닌 나만이 있을 뿐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만 같다.

 

 

 

 

우리는 기술문명의 비약적인 발전과 그에 따르는 대중 사회적 상황과 평준화의 진행 속에서 아무런 내적 연관도 없이 살아가며,

 

스스로 인격의 가치와 존엄을 송두리째 잃어가는 인간 소외와 원자화의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것은 더 이상 인간이 자기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낸 세계를 지배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나 부버는 고도의 기술 혁신에 의한 기계화가 인간의 비인간화와 자기 상실을 가져오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고,

 

위기의 핵심은 오히려 이러한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이 그의 이른바 근원어 ‘나-그것’의 지배 아래 스스로를 매몰시켜버리는 데 있으며,

 

이미 사람이 근원어 ‘나-너’를 말하는 기쁨을 잃어버린데 있다고 말한다.

 

깨진 세계, 인간의 자기 상실과 원자화를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깨진 데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부버는 인격으로서 공존하는 ‘나-너’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서 이를 회복해야 한다고 피력하고 있다.

 

                      마르틴 부버『나와 너』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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