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살아가는이야기

윤동주 시인과 이봄을 함께 하리

心田農夫 2016. 4. 5. 17:18

  

                             박용일의 <윤동주를 찾아서>에서 인용



 

                      윤 동 주

 

우리 애기는

아래밭추에서 코올코올

 

고양이는

부뚜막에서 가릉가릉

 

애기바람이

나뭇가지에 소올소울

 

아저씨 해님이

하늘 한가운데서 째앵째앵

                           1936. 10




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겨울을 보내기가 참으로 힘이 든다. 이제 나이가 나이인지라 더욱더 겨울은 나에게 부담을 주는 계절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언제가 될지 알 수는 없지만, 지금 하는 일을 접는 날 이곳을 떠나서 가능하다면 제주도에서 노년을 보냈으면 하는 마음을 늘 하고는 있지만 여러 가지 주어진 여건이 그리 녹녹하지만은 않다.

 

이렇게 겨울을 나면서 따스한 봄에는 훌쩍 여행을 떠나야지 하는 마음으로 겨울을 지나는 것이 벌써 수년이 지났지만 목련이 피고 개나리가 봄이 왔음을 알려주어도 삶의 울타리를 훌쩍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봄에는 늘 시집을 한권 구입하는 것으로 그 여행을 대신하고 있다.

 

올해 윤 동주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와 한 용운의 님의 沈默을 구입하였다. 같은 날 두 권을 주문하였으나, 님의 沈默은 예약판매 하는 것을 구입하여서 48일쯤 발송된다고 하니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윤동주의 시집을 구입하고 기다리고 있던 중에 다산 연구소에서 보내온 메일 <윤동주를 기억하며>,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이신 배 우성님의 글을 읽으며 마음이 착착하였다.

 

   

                             연변 대성중학교 건물 입

 

중국 지방정부가 윤동주의 생가 터와 그 주변을 대대적으로 정비한 것은 2012년의 일이었다. 집터 입구에는 시인이 나고 자란 곳임을 보여주는 커다란 표지가 설치되어 있다. 그런데 그 명칭이 낯설다. 중국조선족애국시인 윤동주 생가’ . 윤동주 시비에 없던 수식어가 생가 터에 갑자기 생긴 것이다. 이런 현상이 생기게 된 배경에는 어떤 역사가 있었던 것일까?

                                                                                      배우성의 <윤동주 기억하기> 중에서




                                                 윤동주의 생가 텃.  박용일의 <윤동주를 찾아서>에서 인용



중국은 고구려를, 발해를 자신들의 한 부족으로 치부하고, 광개토왕비의 글자까지 고치면서 동북공정에 혈안이 되어있는데, 이런 일도 그 일부가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윤동주는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그였는데, 중국에 귀화나 입적을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렇다면 그는 분명히 대한의 아들이요 대한의 사람인 것이 분명한데도

 

중국조선족애국시인이라 하는 까닭은 윤동주를 중국의 소수민족의 하나인 조선족으로 규정하고 윤동주를 중국인으로 호도하는 것이리라. 이는 일본의 식민지화된 조국 대한민국의 현실에 대한 깊은 고뇌를 하였던 한 조선 청년임을 부인하는 참으로 가슴 아픈 이야기다. 윤동주의 서시도 그렇고 그의 대부분의 시들은 조국의 식민지의 현실을 가슴 아파하며 고뇌 속에서 쓰였던 것이다.

 

국어교과서에 윤동주의 시가 실려 있고 시험을 위해 공부를 하지만 과연 윤동주에 대하여 우리들은 얼마나 알고 있고 그에 대하여 우리는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를 자문해 볼 시점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제 식민지배 통치의 암울한 시절 많은 지식인들이 친일로 돌아섰지만 윤동주는 그들의 폭압에도 굴하지 않고 조국해방의 희망 갖고 저항정신을 시로서 표했던 것이다.

    


                                                    윤동주의 묘와 묘비.  박용일의 <윤동주를 찾아서>에서 인용



서시


                               윤 동 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지는 길을

걸아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 11



                          


작년 유월에 중국여행 중에 대성중학교에 들려서 그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윤동주에 관한 설명을 자세히 들으며 녹음도 했고윤동주를 찾아서라 책도 한권 구입해 왔다. 그곳에서 윤동주의 시비도 촬영을 해왔다. 윤동주를 찾아서라 책에는 윤동주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이 들어 있는데 그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일본 도시샤대학 캠퍼스에 세워진 윤동주 시비에 새겨진 글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100% 윤동주 본인의 친필이다. 이 친필자료를 제공해준 가족에 감사하는 바이다.

 

한편 서울의 연세대학교 캠퍼스에 세워진 시비는 그 글자 일부가 현대풍으로 고쳐져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하여서는 이 방법이 좋지만 윤동주를 기리는 데는 동지사와 같이 친필을 그대로 사용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박일용 편저 고향으로부터 윤동주를 찾아서중에서



                                                    연변 대성중학교 마당에 있는 윤동주의 서시 시비



위의 박 일용선생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한번쯤 깊게 생각을 해볼 만하지 않은가? 시비를 세우고 그 시비에 같은 시를 새기면서 시인의 친필 글씨를 그대로 새기어 그 시의 의미를 더욱더 깊게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글자의 모양을 현대풍으로 새긴다고 무슨 문제가 있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냥 보여주기 위한 시비냐 아니면 정말 그 시비에 새겨진 시를 음미하면서 그 시인의 마음에 동화 될 수 있는 것은 시인의 친필글씨체로 쓰인 시를 음미하는 것이 아닐까? 윤동주를 감옥으로 보내고 결국에는 죽음으로 내 몰았던 일본인들은 지금 그에 대한 시비를 새우면서도 세심한 배려를 하는 점에 대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우리의 것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 목숨을 바쳐서 나라를 위해서 싸웠던 독립 운동가들의 후손들은 혹독한 가난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일본에 빌부터서 나라를 팔고 민족을 볼모로 부귀영화를 누리던 친일파들, 그 후손들은 21세기에도 친일, 친미로 권력과 재력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 참으로 한심하고 부끄럽기만 하다. 우리는 이런 현실에 대한 참회록이라도 써야 하는 것은 아닌지?


 

                                                     연변 대성중학교 건물 입구




참회록(懺悔錄)

 

                                    윤 동 주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래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1942. 1


 




 

생명의 씨앗을 품고 찾아왔던 삼월도 이제 떠나고 봄을 알리려 활짝 핀 백색의 목련이 하나둘 그 꽃잎을 떨구고 있고 출근길 가로수 벚나무도 잎사귀를 피우기도 전에 벚꽃을 활짝 피워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 사월의 첫날을 맞이하였다. 어디론가 봄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못하지만 이봄 시인과 함께 하면서 고뇌 속에서 그리 길지 않은 삶을 살았던 저항시인 윤동주의 사상이 담긴 그의 시와 함께하며 이봄을 보내려한다.





                                                     박용일의 <윤동주를 찾아서>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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