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살아가는이야기

신앙생활은 수신이 전재돼야 하리라

心田農夫 2018. 8. 28. 15:57

                                                이글은 <옛 선비의 자명비를 거울삼아 자신을 비쳐본다.>

                                   수정하여 다시 올린 글입니다.

 

 

 

 

 

 

 

                                         말은 행동을 덮지 못하고

                                         행동은 말을 실천하지 못하며

                                         요란히 성현의 글 읽기만 좋아했지

                                         허물을 하나도 보완하지 못했기에

                                         돌에 세계 뒷사람들을 경계하노라.

 

                                                심졍호의 내면기행

                                    - 허명자명비(自銘碑)인용 - P210

 

 

 

 

옛사람들은 성인의 글을 공부하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을 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즉 공부하며 배우고 읽히는 것은 자신의 삶에 변화를 원하고 옳은 방향으로 자신의 인생길로 삼으려는 것이리라. 그러한 사람을 우리는 선비라 한다. 선비 뜻은 사전에 학문을 닦는 사람을 예스럽게 이르는 말” “재물을 탐내지 않고 의리와 원칙을 소중히 하며 학식 있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나와 있다. 선비를 지금은 지식이라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우리 사회의 지도자들을 옛 시대의 선비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선비는 재물을 탐내지 않고 의리와 원칙을 소중히 하며 학식이 있는 사람이라는데, 오늘날의 선비라 할 수 있는 지식인, 지도층을 보면 어떠한가? 그들을 보면 말과 행동이 전혀 일치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정치인들은 대다수가 거짓을 말하며 국민을 기만하는 것을 수시로 볼 수 있고, 요즈음 뉴스에서 보이는 종교 지도자들 역시 언행일치가 되지 않을 뿐더러, 그들은 재물을 탐하지 마라. 욕심을 버려라. 간음하지 마라. 살인(살생)하지 마라. 어려운 이에게 자비를 베풀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등등 스님은 설법을 통해, 목사는 설교를 통해, 신부와 수녀는 강론을 통해 사랑을 베풀라. 자비를 베풀라. 내려놓아라, 비워야 한다고 말을 하지만, 그들을 보면 전혀 그런 삶을 살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속담에 중이 염불에는 마음이 없고 잿밥에만 마음이 있다.”라는 속담처럼 요즈음 심심치 않게 뉴스에 소게되는 불교계 한 종파의 사태를 보면서 왜 불교계에는 무소유를 말했던 법정 스님과 같은 수행과 실천을 하지 않고 자리다툼만 하는지, 기독교를 보면 자식에게 목사직을 물려주는 교회, 자기가 목회하는 교인의 여자신도를 성폭행하는 목사의 만행을 보면서, 왜 기독교에는 두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양아들로 삼았던 손 양원 목사처럼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목사는 적은지, 가톨릭 성직자들이 수십 년에 걸친 성폭행을 하였다는 뉴스는 충격 그 자체였다. 왜 가톨릭 성직자들은 온몸을 다해 사랑을 실천했던 마더 테레사 같은 사랑을 베푸는 삶을 사는 성직자가 많지 않은지?

 

 

 

 

대중을 착하고 올바른 길로 인도한다는 종교지도자들의 설법과 설교 그리고 강론을 통해서 했던 말을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행동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종교지도자들의 언행의 불일치한 모습을 볼 때, 살아가면서 하는 말을 행동에 옮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 수 있다. 그래서 여러 성인이 언행일치(言行一致)라는 말을 많이 강조한 것이리라. 위의 글은 허명이 86세 때에 스스로 적은 자명비이다. 그는 말은 행동을 덮지 못하고, 행동은 말을 실천하지 못했다라고 스스로 자책하는 말이 얼마나 준엄한가. 옛 선인은 이러한데, 오늘날의 종교인들 그 종교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수신(修身)을 하는지 의문스럽다. 내면기행의 글을 읽으면서 옛 선비의 자명비를 거울삼아 자신을 비쳐보며 수신(修身)에 정진(精進)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