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살아가는이야기

학우들과의 산행

心田農夫 2007. 1. 11. 16:30
 


시간들이 서로 안 맞아서

미루고 미루다 정한 날인데

전날 부는 바람이 장난은 아니었다.


전날의 날씨 때문에 걱정을 했었는데

막상 주일 아침이 되니 걱정했던 것보다는

그래도 바람이 많이 잠잠해 졌다.


어제의 날씨가 뇌리에 남아서인지

아침에 한 학우한데서 전화가 왔다.

‘선생님, 오늘 산행 할 것예요?’

‘그럼 해야지요.’


어제 같아서는 도저히 산행은 고사하고

밖에 나가는 것조차 힘들 것만 같더니

그래도 밤새에 바람이 많이 자자들었다.


집사람에게 물을 끊여 마호 병에 넣어주고

커피믹스와 귤도 좀 담아주고

날씨가 추운데 김밥이 차지 않을까?

컵라면이 좋으련만 뜨거운 물을 어떻게 준비하지 해더니

왜 하필 나이 많은 당신이 준비를 하느라 부산이냐며

한마디 한다.

 

‘나이 먹은 내가 챙겨야지, 누가 챙겨’

‘여자들은 무엇을 하고요’

‘아무나 하면 되지, 당신남편 성격 탓이라 생각해‘

집사람이 챙겨주는 배낭을 메고 집결지인 학교 주차장에서

만나 간단히 김밥과 컵라면으로 점심을 하고는 경주로 향했다.


경주에는 오악(五岳)있다.

토함산(東岳), 선도산(西岳), 남산(南岳), 낭산(中岳)

그리고 소금강산(北岳)을 오악(五岳) 이라하는데

소금강산(小金剛山)은 백률사 뒷산을 말함이다.


우리의 목적지는 오악(五岳)중의 하나인

서악(西岳), 선도산이 우리의 목적지 이였다.

 

 

 

 

높이야 390m의 높지 않은 산이지만

산 입구부터 삼층석탑 등 여러 가지 유물들이 있고

특히 신라 제24대 진흥왕 능을 비롯하여 여러 왕릉 있다.

 

 

 

 

정상 가까이에는 마애석불이 자리하고 있으며

지금은 옮겨져 마애석불 옆에 자리한

성모설화의 성모사(聖母祠)자리하고 있었다.

 

 

 

우리는 성모사(聖母祠)의 안을 살펴보고 싶었으나

자물쇠로 굳게 잠겨져있어서 볼 수가 없어서 섭섭하였다.


성모사(聖母祠)는 박혁거세의 후손인

박 씨 문중에서 관리를 한다고 하며

그 안에는 위패가 있을 뿐이라고 한 분이 이야기를 해주었다

 

 

 

 

 

우리는 섭섭함을 바람에 실어 날려 보내고 발길을 돌렸다.

마에 석불을 카메라에 담고 그 앞에서 사진 촬영을 하고는

멀리보이는 경주의 모습을 보면서 담소를 나누었다

 

 

산을 오르면서 간간히 유물도 보고 그

유물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면서

힘들이지 않고 올라 던 산을 내려오면서

우리는 한해 첫 일요일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서로의 마음에 간직하며 선도산을 뒤로 했다.

 

 

 

 

 

 

 

 

 

                

          경주 ‘선도산’     

                                       (인터넷에서 옮긴 글입니다)


경부고속도로를 따라서 차를 타고


경주 인터체인지를 지나칠 때까지도


경주 시가지는 산너머에 숨어서 보이지 않는다.



선도산에서 흘러내린 산마루가


솟티 고개 쪽으로 드리워 진 것이 마치 펼쳐진


치맛자락처럼 경주를 보호하듯이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솟티 고개를 넘어서면 바로 무열왕릉이 있다.



선도산과 관련해서는

성모설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선도산 성모가 불사(佛事)를 도와준

감응(感應)의 이적에 관한 설화인데,

신이담(神異譚)에 속한다.

 

≪삼국유사≫ 권5 감통편(感通篇)에

‘선도성모수희불사(仙桃聖母隨喜佛事)’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진평왕 때

 

안흥사(安興寺 :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에 있었던 절)의

여승 지혜(智惠)가 불전(佛殿)을 수리하려 하였으나 힘이 모자랐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선도산의 성모가 나타나

불전 수리를 기특한 일이라고 하면서

“내 자리 밑에서 금 열 근을 꺼내 쓰라.”고 하였다.

 

다음날 지혜가 무리를 데리고

신사(神祠)의 자리 밑을 파 보니 황금 160냥이 나왔다.

이로써 불전 수리는 무사히 마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선도산 성모는

본래 중국 제실(帝室)의 딸로 이름을 사소(娑蘇)라 하였는데

일찍이 신선술(神仙術)을 배워 신라에 와 머물렀다.


아버지인 황제(皇帝)가

솔개(독수리) 발에 편지를 매어 딸에게 보냈는데,

그 편지에 이르기를


“이 솔개가 머무는 곳에 집을 삼으라.”고 하였다.

 

사소가 그대로 하였더니 솔개가 선도산에 앉았으므로

사소는 그곳의 지선(地仙)이 되었다.

이로써 산 이름을 서연산(西鳶山)이라 하였다.

 

그 뒤 선도산성모는 오랫동안

이 산에 살면서 나라를 지켰는데

그 동안 신령스러운 일이 자주 일어나

삼사(三祠)의 하나로 삼고 차례를 망제(望帝)의 위에 두었다.


신령스러운 일 중에는

신라 54대 경명왕이 매 사냥을 즐기다가 매를 잃고

선도산 성모에게 기원하여 되찾은 일이 있으며,

또 다른 일로는 선도산 성모가 처음 진한(辰韓)에 와서

아들을 낳아 동국의 첫 임금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아마 신라 혁거세왕과

알영(閼英)의 두 성인을 말함일 것이다.

그리고 신라의 계룡(鷄龍)이나 계림(鷄林) 등의 지명도

닭은 원래 서방(西方)에 속하므로 서악(西岳),

즉 선도산과 관계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김부식(金富軾)이 일찍이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그를 접대한 왕보(王螺)는

김부식에게 우신관(佑神館)에 모셔 놓은 여신상을 가리키며

“이 상은 귀국의 신인데 누구인지 알겠는가?”고 묻자,

김부식이 대답하기를

“옛날 중국 황실의 딸이 바다를 건너 진한으로 가

아들을 낳아 해동(海東)의 시조가 되었으며

그 여인은 지선(地仙)이 되어 선도산에 있는데

이는 그녀의 상이다.”고 대답하였다.


한편, ≪삼국유사≫에서 일연(一然)은 다음과 같은 찬시를 지었다.


“서연산에 머문 지 몇 십 년이 지났는고,              (" 來宅西鳶幾十霜

천제녀(天帝女)를 불러 신선의 옷을 짰도다,             招呼帝子織霓裳

장생술(長生術)도 영이함이 없지 않았는데,             長生未必無生異

부처를 뵙고 옥황(玉皇)이 되었도다. “                  故謁金仙作玉皇).”



이 설화에서는 고대의 산신 신앙(山神信仰)에

불교 사상과 신선 사상이 모순 없이 융합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설화가 곧 역사는 아니지만

선도산은 경주를 지키는 오악 중의 하나인 점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