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살아가는이야기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가?

心田農夫 2009. 5. 13. 11:58

 

보르도에서 만난 부처님

 

                                 신 경 림

 

고풍스러운 술집 벽에 부처님 초상이 걸려 있다.

아니 저건 석굴암 부처님이 아니신가.

나는 반가워 넙죽 엎드려 절을 하는데

부처님 냅다 내 마빡을 갈기며 일갈한다.

 

에끼, 이 소갈머리 없는 놈, 절은 무슨 절이냐!

나 여기서 돈 많이 벌 거다. 뉴욕도 가고

런던도 가고 마드리드도 가서, 돈 잔뜩 벌어다

극락을 정말 극락답게 꾸밀 게다.

부시도 코이즈미도 부러워하고 블레어도

탐이 나서 마침내 투자를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화려하고 멋진 극락을 만들게다

너같이 땡전 한 푼 없는 놈

절 받아 내 무엇 하랴

 

나는 머쓱하니 물러나 구석에 가 앉는다.

아무래도 나는 세계화와는 거리가 먼 모양이다.

돌아가 동네 키 작은 부처님이나 찾아갈까보다.

   

 

 

  

지난 2일이 석가탄신일이다.

각 사찰마다 연등이 줄줄이 매달리고 불을 밝힌다.

자세히는 몰라도 연등을 줄줄이 달고 불을 밝히는 이유는

어두운 세계를 밝게 비춘다는 뜻이 담겨있는 것이 아닌지?

부처님의 공덕으로 어둠을 빛으로 밝힌다는 것은

무지한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요즈음 보면

부처님이 중생을 위해 주신 지혜, 자비, 선행, 해탈 등의

뜻 깊은 부처님의 가르침의 의미를 경전에서는 찾아볼 수 있는데,

불자들에게서는 부처님의 뜻은 찾아보기가 쉽지가 않다.

 

출가를 해 수행한다는 스님들에게서 조차

세속인보다도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은 모습을

간간히 볼 수가 있는 것 같다.

나의 점포에 오신 스님(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고 있기에)이

주문한 물건이 본인이 생각하였던 것보다 금액이 많다고 생각하였는지,

“당신, 지금 누구한테 피박 씌우려는 거야 뭐야

뭐가 그렇게 비싸.”

처음부터 체면과 예의는 간곳이 없고

싸라기밥을 먹었나, 냅다 언성을 높여 반말로 해댄다.

 

그래도 승복을 입고 머리도 깍은 스님인데,

그 스님의 입 통해서 나오는 말이 마치

무슨 조폭이 하는 말처럼 해대는 것을 보고는

순간 너무 어이가 없고 잠시 어안 벙벙했다.

 

짧은 시간이 지나고 정신을 차리면서

이렇게 묻고 싶었다. “스님 맞으신가요?”라고

하지만 내가 한 말은 “스님, 말씀이 좀 과하시네요,

그리고 내 오십 평생을 살아오고 있지만

화투라는 것을 할 줄을 모으는데, 무슨 피박 입니까?”

 

스님이라면 삼보에 귀의한 것일진대,

삼보(三寶)란 무엇인가?

그 하나는 불보(佛寶)요

그 둘째는 법보(法寶) 요

나머지 하나는 승보(僧寶)를 말함으로

“나는 부처에 귀의 합니다.”

“나는 법에 귀의 합니다.”

“나는 승가에 귀의합니다.”라는 언약의 말을 하면서

불교교단에 입문하는 의식을 거치고 스님이 되었을 텐데,

일반 불교신도들도 그들 나름대로 윤리적 수행을 한다고 들었다.

 

윤리적 행동이란

열 가지 부덕한 행위를 피하는 것을 말함인데,

부덕한 행위를 세 가지로 나눈다고 한다.

첫째가 몸으로 짓는 행위요,

둘째가 말로 짓는 행위요

셋째가 마음으로 짖는 행위인 것이다.

 

이를 다시 나누어 살펴보면

몸으로 짓는 부덕한 행위에는

살생, 도둑질, 분별없는 성행위를 말하고

말로 짓는 부덕한 행위는

거짓말, 이간질, 욕설, 함부로 하는 말 등 네 가지를 말함이요

마음으로 짓는 세 가지 부덕한 행위는

탐욕, 앙심, 그릇된 견해를 말함으로

이렇게 열 가지의 부덕한 나쁜 행위를 삼가는 것이다.

 

요즘에야 도시에서도 사찰을 볼 수 있지만

그래도 대다수의 사찰들이 산속에 있는 것은

번잡함으로 온갖 번뇌가 난무하는 세속을 떠나

조용한 곳에서 마음공부를 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공부의 궁극적인 목표는

온전히 깨달아 부처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고

그 깨달음을 통하여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함이 아니던가?

 

그러한 스님의

입에서 어찌도 그런 말이 나올 수가 있는지?

며칠이 지나고 어느 절에 다니시는 불교 신자인 단골손님이 오셨기에

이야기를 했더니, “땡땡이 중이이지, 스님이 아닙니다.

머리 깎고 승복 입었다고 다 스님인가요,

세상이 말세이다 보니 돌중들이 판을 친다니까.”

말씀하신다.

 

그런데 며칠 후에

우연히 들린 고객에게 들어서 알았는데,

나의 점포에서 5km 거리에 있는 절의 주지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객은 스님을 상대로 재판을 준비 중이란다.

오천만원 상당의 물건 값을 차일피일 미루고 안준다는 것이다.

 

단골 소님의 말씀처럼

그 스님 땡땡이 중인가 보다,

그럼 땡땡이중이 있는 그곳은 땡땡이 절인가?

 

“에끼, 이 소갈머리 없는 놈, 절은 무슨 절이냐!

나 여기서 돈 많이 벌 거다. 뉴욕도 가고

런던도 가고 마드리드도 가서, 돈 잔뜩 벌어다

극락을 정말 극락답게 꾸밀 게다.”

 

시인의 말처럼

절은 무슨 절이냐

그리고 스님은 무슨 스님,

십악(十惡)이 어쩌고저쩌고, 마음공부는 무슨 공부

돈만 많이 벌어서 화려하고 멋진 극락,

정말, 극락 같은 극락 만들면 되는 것이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되는 것 아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