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담아두기

보이지 않네.

心田農夫 2010. 3. 12. 13:18

어제 일을 하던 중 법정스님의 입적소식을 듣고는

글을 올리고는 갈 곳이 있어 퇴근을 서둘러 하여 볼일을 보고

집에 들어가 씻고는 늦은 저녁을 먹었다.

 

집사람 “이 시간까지 배가 고파서 어찌 참았어요?” 묻는다.

밥을 차려주고는 식탁에 마주 앉은 집사람에게

법정스님에 대해 블러그에 올리느라고 밥 때를 놓쳤고 하니,

집사람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밥을 먹고는 다시 한 번 읽을 요량으로

「무소유」를 찾는데 보이지를 않는다.

 

4년 전에 지금의 집을 분양받아 들어올 때

책을 정리를 못하고 나중에 정리하지 한 것이 이제 까지 그대로이다.

안방의 책장에도, 공부방에도, 딸아이들 방에도 내 책들이

이산가족이 되어 여기 저기 꽂혀 있다.

 

공부방부터 시작하여 안방,

딸아이들의 방까지 찾아보아도

분명 있어야 할 책이 보이지를 않는다.

집사람에게 물어도 모르겠단다.

 

직장 책장에 없기에 집에 있게구나 생각을 했는데 집에도 없다.

누군가에게 빌려주었나 보다. 그런데 누구에게 빌려주었지?

생각도 나지를 않고, 찾다보니 다른 것들만 눈에 들어왔다.

 

오늘 아침 출근하여 바로 주문을 했다.

「무소유」와 「一期一會」두 권을 주문을 하고 기다린다.

 

「무소유」를 찾다가 까맣게 잊고 있는 책들이 눈에 띠어서

다시 한 번씩을 읽어보려고 한 곳으로 모아 놓았다.

그 책들을 들쳐보다 밑줄 칠 부분과 사진을 옮겨본다.

 

 

 

 

출가란 살던 집을 등지고 나온 것만으로 그치지를 않는다.

성에 차지 않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남이요, 거듭 거듭 밀치고 일어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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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장한 결단 없이는

일상적인 타성과 잘못 길들여진 수렁에서

헤어날 기약은 영원히 오지 않는다.

누가 내 삶을 만들어 줄 것인가,

오로지 내가 내 인생을

한층한층 쌓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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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가치 척도는 어디까지나 주관적이요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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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들은 돈을 좋아하지만

나는 순간의 고요를 즐긴다

돈은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고요 속에 본래의 내 모습 드러난다.

탐욕이 없는 것이 진정한 보시오

어리석음 없는 것이 진정한 좌선

성내지 않음이 진정한 지계(持戒)요

집념 없음이 진정한 구도다.

악을 두려워하지 않고

선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인연따라 거리낌없이 사니

모두가 함께 반야선(般若船)을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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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 귀는 대숲을 스쳐오는 바람소리 속에서,

맑게 흐르는 선골의 시냇물에서,

혹은 우짖는 새소리에서,

비발디나 바하의 가락보다 더 그윽한 음악을 들을 수 있다.

빈 방에 홀로 앉아 있으면

모든 것이 넉넉하고 충만하다.

텅 비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가득 찼을 때보다

더 충만한 것이다.

법정 「텅 빈 충만」중에서

 

 

 

 

 

 수도는 침묵의 세계이기 때문에

될 수 있는 한 말이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일상에 하는 말을 살펴보면,

쓸 말보다는 불필요하고

못쓸 말을 남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말을 하지 않아서

후회하는 일보다는

말을 했기 때문에 후회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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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에 말이 적으면 어리석음이 지혜로 바뀐다.

입은 재앙의 문이기도 하므로 엄하게 지켜야 한다.

승찬 대사의 <信心銘>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진리로 부터

점점 멀어진다.

말과 생각이 끊어지면

어느 곳엔들 통하지 않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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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강물처럼 흐른다.

날마다 똑같은 사람일 수 없다.

그러니 함부로 사람을 심판할 수 없다.

내가 판단을 내렸을 때,

그는 이미 딴 사람이 되어 있을 수도 있다.

 

법정의 「말과 沈黙」중에서

 

 

 

 

말이 씨가 된다고 하더니, 이번에 이루어진 내 인도여행도

말이 씨가 되어 단행된 샘이다.

지난 가을 법회나 강연의 청탁이 있을 때마다,

올 겨울은 인도에서 지내게 될 거라고 하면서

한결같이 거절해 왔었다.

나에게 있어서 인도나 불타 석가모니와 마하트마 간디,

그리고 크리슈나무르티로 채워져 있다.

이분들은 하나같이

내 자신의 인간 성장의 길에 적잖은 영향을 끼쳐준 스승들이다.

불타 석가모니는 2500년 전의 지혜와 자비의 교훈을 통해서,

20대 중반에 내 인생의 궤도를 수정하게 한 어른이고,

마하트마 간디는 종교의 본질과 진리의 실상이

무엇인지 깨우쳐주었으며,

소유의 관념에 대해서 영향을 끼쳐준

영혼의 스승이다.

그리고 크리슈나무르티는 현대의 우리들의

직면한 문제들의 가르침을 통해서

삶의 지혜와 잔잔한 기쁨을 누리도록 이끌어준

고마운 스승이다.

그래서 이번 여행 중에 특히

이 세 분의 스승들이 살았던 그 현장을 찾아가

그 고장의 흙냄새와 햇볕과 바람을

쏘이면서, 그 땅에서 자라나는 나무와 꽃들을 바라보고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인간사에 대한 이런 일 저런 일들을 헤아려 보려고 했다.

 

법정 「인도 紀行」중에서

 

 

                                               <짐승이 사람보다 의젓한 거리>

 비교적 한산한 캘커터의 뒷거리 누마켓 부근.

사람과 자동차와 마차와 인력거와 소가 한데

어울려 이 거리를 이루고있다.

명상에 잠긴 듯한 소들의 표정이

사람보다 훨씬 의젓하게 보인다.

 

 

<거리의 코코넛 장수> 

목이 마를 때 이 코코넛(야자) 물을 마시면 

이내 갈증이 가신다.

우리 돈으로 1개에 150원쯤 하는데,

가장 위생적인 음료수다.

 

 

<영취산 가는 길> 

그 옛날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이 길을 오르내렸다.

마가다의 왕  빔비사라도 부처님을

친견하기 위해 수레에 내려

이 길을 오르내렀다 한다. 

  

 

<대탑의 보리수> 

부처님은 이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이루었다.

원래는 '팝팔라'나무인데,

그 아래서 보리(道)를 이루어 보리수라 불러졌다.

 

 

<미얀마  스님들과 함께> 

부처님의 거처인 이 향전에서 향을 사르고

예배 드린 후 독경을 하니

그 감흥이 절절했다.

미얀마에서 온 두스님은 필자가 독경하는 동안

옆에서 앉아 함장하고 있었다.

 

 

<성지 순레의 가족들>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날 기약도 없이 스치고

지나가는 나그네들 끼리 인사를 나누는 이 인연,

뒤에 보이는 평원이 '슈라바스티' 의 유적.

 

 

<대보리사의 대탑> 

 부처님의 성도(成道)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기원전 3세기 아쇼카왕이 세웠다.

4각 4면의 높이 52미터의 이 탑은 굽타왕조의

당당한 위풍을 지니고 있다.

 

법정 「인도 紀行」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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