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담아두기

나는 나를 아는가?

心田農夫 2010. 3. 13. 12:40

 

 한통의 전화가 시간을 거슬러 흐르게 한다. 작년 12월 말쯤 있었던 일이 나에게 준 충격은 너무도 커였다. 생각하기도 싫고 말하기 싫은 것을 한 통의 전화가 다시 상기시킨다. 이제 서서히 상처가 아물려고 하는데, 그만 전화 한 통이 나의 혈관을 잔잔히 흐르는 피를 요동치게 한다. 상대는 그저 궁금하여 안부를 묻는 것이리라.

 

 일진인 나빠 던지, 생각지도 않았던 일을 겪게 되었고 그 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밤에 잠을 들지 못하고 뒤척이다 살며시 잠들었다가 다시 깨어 다시 잠을 들지 못하고 하야케 밤을 지새우기도 여러 날이었다. 그러면서 왜? 라는 물음과 함께 자신에 대하여 생각을 하였다. 그러다 보게 되었던 책 한권

 

지신을 아는 사람은 사망의 골짜기에서도 넘어지지 않고, 어느 곳을 가더라도 수치를 면하고, 누구를 만나더라도 찢어진 상처를 덮어줄 수 있다. 자신을 아는 사람은 그를 실망시킨 사람도 다시 일으켜 세우며, 누구를 만나더라도 아프고 시린 마음을 위로해 준다. 절망에 빠진 사람을 나락에서 건져내고, 어두운 마음에 초록빛 환희와 한량없는 평안을 더해준다. 죽어가는 모든 것을 감싸 안으며, 소망의 싹이 자라나게 하는 기름진 언어를 가졌고, 간결한 언어로 아픈 마음을 치유하고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언어를 심으며, 상대의 마음에 소망의 날개와 희망의 씨앗을 심어준다.

                                         이 명 화의「사랑에도 항체가 있다」중에서

 

 수필가 이명화는 “나를 안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몸을 안다는 것이다. 자신을 아는 사람은 상대에게 무례한 요구를 하거나 경박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자신을 아는 사람은 타인의 불행한 삶에도 가슴 아파하고 못 견디게 괴로워할 줄 안다.”, 나는 나를 안다고 생각했다. 남에게 무례한 행동도, 경박한 행동도, 타인의 불행에 가슴도 아파했고 눈물도 흘릴 줄 안다. 그런데 어찌하여 왜? 아니 어쩌면 나는 나를 잘 안다는 착각 속에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자신을 잘 안다고 살면서도 자신인, 나를 모르고 살아 왔는지 모르겠다. 위대한 철학자의 말을 들어보면 나는 나 자신을 몰랐던 것이 아니었던가. 생각되어진다.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시민들에게 말했다지? “너 자신을 알라, 너 자신을 알라”소크라테스의 말에 그의 제자가 물었다지, “그렇게 말씀하시는 선생님은 선생님 자신에 대하여 아십니까?”제자의 질문에 소크라테스가 답했다지,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그 위대한 철학자도 자신을 잘 모른다는데, 과연 나는 얼마나 나를 알고 있을까? 나라는 존재는 분명히 존재하는데, 존재하는 나 자신을 알 수 없다는 것, 그것은 모순이 아니던가, 아니 존재하면서도 존재에 대한 생각이 없어서는 아니었던가?

 

 데카르트가 말했다지? “I think, therefore I am”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요즈음 자신에게 던지는 물음이다. 진정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이고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요한복음 8:14에서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다.”예수는 말씀하신다. 어쩌면 예수의 말씀처럼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서 지천명의 나이가 되도록 종교생활을 해왔었는지를 모른다. 그러나 아직 그 해답을 찾지를 못하였고 나의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어쩌면 미완의 답으로 남을 줄도 모르리라. 그러던 차에 듣게 된 불교 사회복지연구란 강의를 시작으로 불가에서 나를 찾아보려고 이 책 저책 뒤져도 보았고, 교수에게 질문에 질물을 해도 보았다. 불가에서는 자신을 버려야 자신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기는 알았는데, 나를 버리는 것은 무엇이고 나를 내가 만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참나’의 본성을 보는 것이라 한다. 한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참나’를 알고 ‘참나’를 얻는다는 것은 생사로부터 자유를 얻은 것이라며 명행스님을 이렇게 말씀하신다.

 

“생과 사로부터 진정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오로지, 순간순간 깨어 있고 순간순간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것을 의미 합니다. 이것은 매우 간단한 메시지이지만, 대단히 흥미로운 인간의 상황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가르침을 듣지만, 단지 이 몸, 이 무상한 수레, 어느 날엔가는 우주로 돌아가게 될 이 렌터카를 만족시키기 위해 우리의 생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잠에서 깨어나 우리의 ‘참나’를 진정으로 이해한다면, 그때는 이 렌터카를 우주에게 돌려줄 때가 되어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때는 문제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공부하다 죽어라」중에서

 

 그 본성을 보는 것은 나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부처의 씨알’을 밝혀내는 것이요, 자신의 마음을 올바로 보는 것이란다. 그것을 보고 밝히는 것이라고 「수심결」을 지으신 지눌 스님을 말씀하신다.

 

자신의 ’신령스러운 앎‘ 도 또한 이와 같도다. 이미 자신의 마음인데, 어찌 다시 알고자 하는가? 만약 알기를 구한다면, 마침내 알 수 없을 것이다.’다만 모른다는 것’만 똑똑히 알면 되니, 이것이 바로로 ‘본성’을 본 것이다. 즉 깨달아 알아차리는 본성(견성)’이다.

                                                 지눌의 「수심결」중에서

 

 보조국사 지눌스님은 ‘다만 모른다.는 것만 똑똑히 알면 되니, 이것이 자신의 본성을 보는 것이요, 바로 견성이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그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도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하면서도“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고 했다던가? 자신을 모르는 것을 똑똑히 아는 것이 자신을 바로 보는 본성이요 깨달아 알아차리는 것이라 한다.

 

 다석 유영모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옛적부터 이름 없는 ‘참나’를 알아야 합니다. 옛적부터 이름 없어 내 오직 나로 나입니다.”그리면서 나로 나를 아는 것은 멸망의 생명인 제나〔自我〕인 나를 버리고 영원한 생명인 얼나〔法我〕를 깨달아야 한다고 말하며 얼나(진리)를 깨닫는 것이 최고의 개달음이며 이는 스스로 깨닫는 것이지 누구를 의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것은 실재의 나, 진정한 본성에 대한 무지요, 진정한 본성의 자아에 대한 무지 때문입니다. 이 무지를 깨닫는 것이 자신을 아는 것, 참나를 아는 것 그것은 자신의 마음에 있다고 합니다. 자신의 마음, 그 마음을 바로 볼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나로서 나를 아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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