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담아두기

물음표만 남았네.

心田農夫 2010. 3. 20. 14:27

 

무엇이 그리도 바쁜지

아니 마음이 바쁜 것인가 보다.

시간이야 인간이 정해 놓은 것이 아니더냐.

인간의 편리를 위하여 하루 24시간이라고.

 

그 시간

내가 자유로이 활용을 해야 하는 것일 진데

시간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여러분이 다녀가시고

그 귀한 시간을 내시어 댓글을 주셨는데도

답 글조차 달 시간이 없었다는 것은

시간의 노예였다는 것이리라

 

법정스님이 떠나시고 난 후

소유, 무소유,

그리고 영원히 답이 없을 화두

삶과 죽음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여 본다.

 

법정스님의 입적 소식에

아마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생각들을 하는 것인지,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비롯하여 「산에는 꽃이 피네」등

스님의 책들이 절판이 되었다고

죄송하다는 안내 메일이 날아든 것을 보면.

 

대학원 마지막 논문학기에

죽음에 관한 논문을 쓰겠다고

자료준비로 보았던 에드가 몰랭의 <인간과 죽음>,

퀴블러 로스의 <인간의 죽음>을

다시 펴보면서 삶과 죽음은 무엇일까?

 

살과 죽음이란 화두를 던져보며

삶과 죽음과 소유란 어떤 의미이고 무소유란 의미는 우엇일까?

 

꼬리에 꼬리를 물어

물음에 물음을 던져 보지만

하루의 24시간 간 곳 없고

마음에 답이 없이 물음표(?)만 멍울져 남는다.

 

 

                              <축축한 대지를 들고 솟은 버섯의 생명력>

 

죽음은 인간을 동일시시켜 주는 것이기도 하고,

또한 동물로부터 인간을 구분지어 주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생명체처럼 인간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만이 예외적으로

‘저세상에 대한 믿음으로 죽음을 부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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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인간의 부적응이 상대적이라면,

죽음에 대한 적응 역시 상대적이다.

자신의 생을 위태롭게 하는 사람이

자신의 죽음을 수용할 준비를 하고 있다면,

그의 죽음은 그에게 덜 무서운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그의 생의 명령에 따라 강제된 상태로 있는 것이고,

그는 죽음과 대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을 무릅쓴다는 것은 죽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흔히 죽음을 우습게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생을 사랑하지만, 생의 가치를 맛보기 위해서는

생을 철저히 위태롭게 할 줄 알아야만 한다.

죽음은 그것과 손잡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을 두려워한다.”라고 현대의 모험가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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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죽음은 태어남을 불러오고,

반대로 모든 태어남은 죽음을 불러온다.

바슐라르가 말하는 것처럼

“인간이 자기 자신의 속에서,

사물들 속에서, 혹은 우주 속에서‥‥‥

느끼는, 깊이를 말하는 ‥‥‥

큰 이미지들은 우주동형적이기 때문에 자연히

서로서로에 대한 은유들이다.”

이런 이유로 부름은 두 방향에서,

즉 죽음 - 태어남과 태어남 - 죽음에서 이루어진다.

                               에드가 모랭 「인간과 죽음」중에서

 

 

                                  <저 아름다움도 언젠가 사라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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