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담아두기

아! 선비의 정신이 그립구나.

心田農夫 2010. 3. 25. 11:54

 

 

 나는 얼마 전 한권의 책을 읽으며 그 책에 나오는 인물들이 살았던 대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책은 「선비답게 산다는 것」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그 책의 제목처럼 선비답게 살아보고 싶은 것이다. 선비답게 살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편 선비란 과연 어떤 인물을 말하는 것이며 선비란 어떤 뜻을 담고 있나, 사전을 찾아보았다.

 

선비[명사]

1 예전에, 학식은 있으나 벼슬하지 않은 사람을 이르던 말.

2 학문을 닦는 사람을 예스럽게 이르는 말.

3 학식이 있고 행동과 예절이 바르며 의리와 원칙을 지키고

관직과 재물을 탐내지 않는 고결한 인품을 지닌 사람을 이르는 말.

 

  사전에서 말하는 그 정의를 보니 1,3번의 “학식이 있으나, 학식이 있고”는 나하고 상관이 먼 것 같고, 나 자신 학식이 있다고 말할 수 없음이기에, 그러나 2번의 “학문을 닦는 사람”이란 정의는 그래도 나하고 연관이 있을 듯싶다. 늘 무엇인가 배우고자하는 마음이 있느니, 2번의학문을 닦는 사람을 예스럽게 이르는 말”에 해당한다고 해도 큰 잘못은 아니지 않겠는가? 우리나라 대다수의 사람들을 선비라 해도 잘못된 표현은 아니리라. 교육열이 세계에서 제일의 나라요, 고학력자가 많은 나라이니 대다수의 사람들을 선비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 내가 이렇게 장황하게 선비에 대하여 논하는 것은 작금에 시사되고 있는 두 이야기에 대하여 보고 있자니 참으로 한심스러운 생각이 들어서이다. 인터넷신문에 난 그 첫째 이야기를 일부 옮겨본다.

 

한겨레 역시 3면에서 "논란의 자리에 동석했던 김씨는 23일 봉은사 명진 스님이 공개한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좌파 주지’ 관련 발언이 모두 사실이라고 확인했다"며 "이날 기자회견으로 봉은사 직영사찰 전환을 둘러싼 외압 발언 논란은 사실상 마침표를 찍었다"고 보도했다.

 

외압 발언 자리에 동석했던 안상수 원내대표와 자승 조계종 총무원장은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총무원 대변인인 원담 스님은 이날도 “외압은 없었다”고 강력 부인했다. 그러면서도 “대화 내용은 공개할 수 없으며 ‘그 이상의 압력이 있어도’ 움직이는 종단이 아니다”라며, ‘외압’ 가능성은 한가닥 열어두었다.

 

한겨레는 조계종 총무원의 이런 모순적 태도에 대해 ‘불심’을 의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한 10·27 법난과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의 ‘종교편향’으로 인한 피해의식이 적지 않은 불심의 분노가 자칫 총무원을 향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불교 신자가 아니요, 불교학자도 아니라 잘 모르기는 하지만, 불교란 무엇인가? 불교의 중심사상은 자리이타(自利利他)요 이타자리(利他自利)가 아니더냐? 이타(利他)가 무엇이고 대승(大乘)이 무엇인가? 즉 자신을 위할 뿐 아니라 남을 위하여 불도를 닦는 다는 것이요 남에게 이롭게 하는 것이 자신을 위한다는 사상, 그 사상이 불교의 중심사상이요, 그 사상의 핵심이 대승(大乘) 아니더냐. 그 대승사상의 깊은 뜻은 중생을 제도하여 부처의 경지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리라. 그런데 중생을 제도하지는 못할망정 수행한다는 스님들이 서로서로를 헐뜯고 서로서로 거짓말쟁이로 몰고 있는 것이 아니더냐. 스님들은 출가승들이다. 출가란 무엇인가? 세상사의 온갖 집착에서 벗어나 해탈하여 자유자제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말함이요. 그 집착의 집에서 떠남이 출가가 아니던가. 그대들이 진정한 출가승이라면 세속적인 명예나 지위에 연연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리라

 

  현재 우리나라 체제는 제정일치(祭政一致)체제가 아니요. 제정분리(祭政分離)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자각하여야 하리라. 정치는 정치고 종교는 종교인 것이요, 정치가 해야 할 일이 있고 종교가 해야 할 일이 따로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인이라면 그것도 한나라의 정권을 장악한 여당의 원내대표라면 지도자요 공인인의 입장인 것이다. 정치를 한다는 정치인이니 어느 곳에서나 어떠한 사람이든 만날 수도 있고 만나서 식사도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처신에 있어서 신중을 기하였어야 하지 않았을까? 옛 속담에“새도 가지를 가려가며 앉는다.”했고 “배 밭에서는 갓끈도 고쳐 매지 마라.”는 말도 있다. 이 세상 더불어 살아야 같이 살 수가 있는 것이다. 우익과 보수만 있다고 세상이 좋아질 것 같은가? 우익이 있으면 좌익도 있어야 하고 보수가 있으면 진보도 있어야 세상이 돌아간다. 진보만 있어도, 보수만 있어도 이 사회는 존재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즉 공존이 해야 된다는 것이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의견이 달라도, 사상이 달라도 다른 의견, 다른 사상을 존중하면서 나의 의견 나의 사상을 상대에게 이해시키면서 서로서로 의견을 존중하여야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법정스님이 입적하시고 우리들이 그분의 무소유의 삶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고 고인에게 존경하는 마음을 표하는 시점이 아니더냐. 그리고 스님의 말과 침묵에 대하여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나.

 

수도는 침묵의 세게이기 때문에 될 수 있는 한 말이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일상에 하는 말을 살펴보면, 쓸 말보다는 불필요하고 못쓸 말을 남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말을 하지 않아서 후회하는 일보다 말을 했기 때문에 후회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법정의 「말과 침국」중에서

 

  봉은사도, 조계종 총무원도, 원내대표도 설왕설래(說往說來)를 멈추어야 하리라 말을 하지 않아서 후회하는 일보다 말을 해서 후회를 하는 우를 범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누가 잘했다 누가 잘못했다 시시비비를 따져보았자. 남는 것은 서로에게 상처만이 남을 뿐이다. 잘못한 것이 있다면 솔직히 시인하고 용서와 이해를 구하는 것이 이 시점에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큰 스님들이 할 일이요 정치를 하는 정치인의 올바른 자세일 것이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법정스님의 저서 「무소유」1권이 옥션에 경매에 물건으로 올린 것에 대해서이다. 그 인터넷신문의 내용을 일부 옮겨보면 아래와 같다.

 

로미오제인은 '무소유'를 경매에 올리면서 "이 책을 읽어주실 다른 분이 가지셨으면 하는 바램으로 판매하게 됐다. 팔리는 금액으로는 어려운 이웃들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봉사단체에 기부하고 싶다"고 했다.

 

1000원에서 시작된 가격은 조금씩 오르면서 경매 시작 이틀 만에 80만원에 이르렀다. 21일 오전10시께 한 입찰자가 9억원을 부르며 엄청난 가격이 뒤를 이었다. 10억, 10억5000원 등이 이어져 22일 오후4시 현재 21억원에 달한 상태다 한편 시중에서 '무소유'는 한 권 8000원짜리가 15만원까지 호가하고 있으며 서점에서는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찾는 사람이 많다.

 

  책의 제목이 ‘무소유’가 아니던가. 그리고 경매에 올린 사람은 무소유를 읽어보았으니 경매에 올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내용을 알고 있을 것이고 저자인 법정스님이 왜 그 책을 저술했을 것인지 스님의 깊은 속뜻을 다는 몰라도 조금은 책의 내용에서 이해하였으리라 법정스님이 말하는 무소유에 대하여서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다는 것이 아니다. 궁색한 빈털터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무소유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때 우리는 보다 홀가분한 삶을 이를 수 있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이것은 소극적인 생활 태도가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책을 경매에 올린 사람이나 그 경매에 참가한 사람들이나 진정 법정스님을 조금이라도 이해하였을까? 아니 이해하려는 노력이나 한 번 해보았을까? 의구심이 든다. “책을 읽어주실 다른 분이 가지셨으면 하는 바램으로,”참 여기까지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참으로 훌륭하고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무소유에 대하려 이해 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텐데, “판매하여 팔리는 금액으로 어려운 이웃들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봉사단체에 기부하고 싶다.”고 했단다. 참 훌륭한 생각이다 . 불교의 사상이 이타(利他)를 실천하는 것이니 그 얼마나 고귀하고 숭고한 뜻이냐 그러나 그렇게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는 사람이 책의 가치를 희소성에 두고 그것을 경매에 올리고 경매가격으로 이웃을 돕겠다는 발상은 법정스님을 모독하는 처사가 아닐까?

 

  스님의 유언에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에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 부디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하지 말아 달라.”는 유지로 책의 출판이 되지 않고 있고, 그 동안 있던 책도 스님의 입적 후 찾는 이가 많아 절판이 되었다는 것이다. 장사치 마냥 시장경제의 희소성의 원리를 생각했다는 것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발상이 아닌가.

 

  옛말에 “책 도둑은 도둑도 아니다.”라는 말도 있다. 배우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가난하여 책을 살수가 없어서 책을 훔쳐서 라도 공부를 하겠다는 그 심정을 이해하여 용서를 해준다는 뜻일 것이다. 이처럼 책의 가치는 그 책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의 내용에 있는 것이다. 사실 책이라는 것이 읽고 나면 그 책은 책으로서의 사명과 수명을 다하는 것이리라. 법정스님도 생존에 그런 말씀을 하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내가 뿌리치지 못하는 소유욕이 있는데 그것은 책에 대한 소유욕이고, 다른 하나는 다기(茶器)에 대한 소유욕이라 하셨다. 그러다 언제가 또 말씀하시기를 이제 책에 대한 소유욕에서 벗어났다.

이렇게 큰 스님도 책에 대한 소유욕을 놓기 어렵다고 하셨는데 법정스님을 사랑하는 불자들이 희소가치가 있는 스님의 「무소유」를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야 오죽하겠는가. 스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소유하겠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법정스님을 사랑하는 것일까 한 번쯤 생각을 해볼 일이다.

 

  내 짧은 소견이지만 책을 경매에 내놓은 그분 판매금액으로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는 생각도 좋지만, 이렇게 생각을 해볼 수는 없었을까? 그 책을 읽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주면서 다 읽고 난 후 그 사람이 읽고 싶어 하는 또 다른 사람에게 주어 읽게 하여 계속 돌려보게 한다면 마음이 가난하여 정신적 피폐를 겪으며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삶에 활력소가 되지 않았을까? 지금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물질의 궁핍은 참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인생을 포기하는 극한 상황도 마다하지 않는다. OECD 가입국 중에서 우리나라가 자살률이 1위라는 사실을 볼 때 우리의 현실에서 정신이 가난하여 방황하는 사람들 중에서 단 한 영혼이라도 그 책으로 인하여 맑은 영혼을 소지 할 수 있다면 그 책의 가치는 몇 십억 원보다 더 값진 것이 아닐까? 사람의 생명은 돈으로 비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그것이 법정스님이 생전에 그 책을 저술하신 뜻이 아닐까 생각해보면서 모든 것을 금전적으로 풀려고 하는 오늘의 세태가 서글프고 한편으로 이제 스님이 입적하신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런 일이 일어나는 가하는 안타까운 마음이다.

 

  내가 우리 선조들이 살아왔던 방식대로 살고 싶다는 것, 즉 선비답게 살고 싶다는 것은 「선비답게 산다는 것」에 나와 있는 아래 내용이 나에게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다. 사제 김정국이란 분의 이야기다. 그 분은 벼슬을 그만두고 사제라는 호마저 새로 ‘팔여’라 지었다. 그것을 보고 친구가 그 뜻을 물어보자 여덟 가지 넉넉한 것이 있다는 의미라고 말했단다.

 

토란국과 보리밥을 배물리 넉넉하게 먹고, 부들다리와 따스한 온돌에 잠을 넉넉하게 자고, 땅에서 솟는 맑은 샘물을 넉넉하게 마시고, 서가에 가득한 책을 넉넉하게 보고, 봄날에는 꽃을 가을에는 달빛을 넉넉하게 감상하고, 새들의 지저귐과 솔바람소리를 넉넉하게 듣고, 눈에 핀 매화와 서리 맞은 국화에서는 넉넉하게 향기를 맡는다네, 한가지 더, 이 일곱 가지를 넉넉하게 즐기기에 팔여라고 했네.

 

 팔여거사 김정국의 그 말을 듣고서 친구가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런 말을 건냈다

 

세상에는 자네와 반대로 사는 사람이 있더군. 진수성찬을 배불리 먹고도 부족하고, 휘황한 난간에 비단 병풍을 치고 잠을 자면서도 부족하고, 이름난 술을 실컷 마시고도 부족하다네, 울긋불긋 그림을 실컷 보고도 부족하고, 아리따운 기생과 실컷 놀고도 부족하고, 좋은 음악을 다 듣고도 부족하고, 희귀한 향을 맡고도 부족하다 여기지,  한가지 더, 이 일곱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그 부족함을 걱정하더군. 내 자내를 따라서 여덟 가지를 넉넉하게 즐기는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 속물을 따라서 부족함을 걱정하는 인간은 되고 싶지 않네.

 

  그분의 친구 역시 대단하다, 여덟 가지 넉넉함에 대한 답으로 부족한 것에 대하여 말을 하고 친구를 따라 살기로 했다는 것이니, 두 분이 그 친구에 친구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세속의 선비들도 이러한 삶을 살아갔는데, 출가한 구도자들이 정진하여 깨달음에 이르기를 힘써야지 세속에 물들어 세속의 것을 탐하여 서로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작태가 아닌가 말이다.

 

  옛 스님들은 수련을 하면서 먹을 양식을 구하려 탁발을 해야 했다. 거기에 비한다면 오늘날의 스님들은 얼마나 편한가? 많은 불자들이 가져다 바치는 것들만 갖고도 호의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잘 먹고 잘 입고 있으면 깨달음을 위하여 정진에나 힘써야 하는 것이 아니던가? 다산 정약용이 탁발을 하려고 산에서 나왔다 스승의 스승인 다산에게 인사차 들렸을 때 제자에게 한 말이다. 지금 다툼을 하는 스님들이 한 번쯤 읽고 마음에 담고 정진을 한다면 깨달음에 이르는데 도움이 되리라.

 

“어찌 나왔느냐?”

“먹을 것이 다 떨어져 양식을 탁발하러 나왔습니다.”

“승려가 도를 닦아 깨달음을 얻지 못한 것을 배고파해야지, 그까짓 창자의 굶주림을 못 이겨 이 먼 데까지 나왔더란 말이냐? 배불리 먹어 얼굴에 개기름이 흐르고, 절집을 높이 지어 단청을 입히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표범의 가죽이나 공작새의 깃털 같은 것일 뿐이다. 너의 전전긍긍은 고작 육체의 굶주림과 물질의 가난에 있을 뿐이로구나. 가슴속에 진망유무(眞妄有無)의 분별을 길러, 무엇이 헛되고 무엇이 참된 것인지를 깨닫는다면 그까짓 창자의 배고픔은 문제도 안 될 것을! 네 목구멍을 위해 애를 쓰고 화장실에 충성을 하는 정성으로 깨달음의 공부에 힘을 쏟으면 좋으련만! 아, 안타깝구나.”

                                             정민의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중에서

 

  오늘의 세간을 시끄럽게 하는 일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다. 석용산스님이란 분이 쓰신 책인가? 「여보게 저승 갈 때 뭘 가져가지」책 제목처럼 저세상 갈 때는 가져 갈 것이 없는데, 스님들이 어찌 하여 이리도 세상을 시끄럽게만 하는지, 진정, 선비 정신이 필요한 시대인 것 같다. 아! 선비정신이 그립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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