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살아가는이야기

이단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心田農夫 2010. 4. 8. 15:01

 

몇 일전 e-mail을 받았다. 한 5년 전쯤 점포에 손님으로 오셨던 분이다. 오년 전이라 기억이 확실한 것은 아닌데, 오셨을 때 이곳 포항이 고향이신데 지금은 나의 고향인 서울에 사신다고 하면서 부모님이 있어 간혹 오신다는 이야기를 했고 서울 나의고향에 대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전했다. 그 분이 가시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몇 자 적었던

 

 

텃새가 물어다 준 그림

 

춘삼월도 아니요

이슬 먹는 아침에 까치도 울지 않았는데

고향하늘 나르던 아름다운 텃새

타향살이 외로움에 젖은 기러기에

밤섬의 정다운 소식 전 하네

 

한강의 그리움 몽글몽글 이슬 되어져

방울방울 눈가에 맺히고

멀기만 느껴지던 고향산천

마음에 가까이 다가오니

철없이 날아다니던 밤섬의 옛 일들

그림 되어 주점주점 뇌리에 투영 되네

 

글과 함께 고향에 대한 이야기 고마웠다는 내용의 글을 적어 e-mail로 보냈었다. 내 가게를 이용해 주어 감사하다는 내용과 오셔서 고향에 대한 이야기해주어 고맙다는 이야기를 나름대로 적어 보낸 일방적인 메일이어서인지 답장이 없었다. 보내고 나서 나도 잊고 지냈는데, 얼마 전 옛 메일을 정리하다 메일을 보고서 기억이 났다면 메일을 보내왔다. 그 분 나의 메일에 적힌 이름 .심전농부’ 대하여 묻으시기에 블러그 주소와 이름에 대하여 설명을 한 답장을 보냈더니 다시 메일을 보내 왔는데. 그 메일이 나에게 하나의 화두를 던져준다.

“이단”이라는 화두다. 이단, 이단이란 무엇일까?

우선 사전에서 이단에 대하여 찾아보니 이랬다.

 

이단[異端][명사]

1 자기가 믿는 이외의 도(道).

2 전통이나 권위에 반항하는 주장이나 이론.

3 같은 말: 이단자

연관단어 : 이단자

 

그리고 백과사전에는 이단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단(異端)은 보편적으로 정통 이론에서 많이 벗어난 교리, 주의, 주장 등을 총칭한다. 종교, 철학, 정치학, 과학, 예술 등 다른 분야에서 권위 있는 의견이나 이론에 반대되는 것이라는 확장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종교적 이단

 

기독교

기독교에서는 경전인 성서에 위배되고, 공의회를 통해 고백된 사도 신조 니케이신조, 칼케돈신조 등의 정통적인 신앙고백과 일치하지 않거나 반대되는 신학적 또는 신앙적인 이론, 또는 그런 이론에 바탕한 종교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즉 기독교 내 다양한 종파를 비롯하여 기독교가 아닌 종교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이슬람

전통적으로 수니파에서는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를 파조(派祖)로 하는 시아파를 이단으로 규정해 왔었다.

 

유학

유학에서는 정학(正學)에서 벗어난 사상이나 종교를 이단시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 실례로 천주교가 조선에 들어왔을 때, 조정과 노론계 보수유학자들이 천주교는 정학인 유학에 반하는 사학(邪學)이라고 하면서 박해하였다.

 

국어사전에나 백과사전에서 보면 전통이나 권위에 반항하는 주장이나 이론. 성서, 공의회에서 채택된 신조에 위배된 것을 이단으로 본다는 것과 자신과 다는 종교나 종파를 이단으로 본다고 하는데, 내 보기에는 이 모든 것이 자신들의 주관적 견해와 자신들의 이타심에 반하는 것을 이단이 부르는 것이라고 보아도 큰 무리는 없다고 보여 진다.그 신조와 교리가 만들어진 과정을 살펴본다면

 

451년에 있었던 칼케돈 공회에서 니케이 신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세 가지 위격으로 존재하지만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모두하나다.를 새롭게 보강했다. 새롭게 보강된 신조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의 신성과 하나의 인성, 두 본성을 가진 하나의 (신적인)인간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신조의 교리가 나오게 된 배경을 보면 권력의 다툼 속에서 탄생되었다는 것이다.

 

예수의 신성을 부정했던 알렉산르리아의 아리우스는 그리스도가 만물 이전에 창조된 게 사실이지만 성자 역시 피조물 이라고 주장을 했다.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다면 태어난 자는 반드시 존재의 시작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이 있었다는 게 분명해지고, 그가 비존재로부터 존재하게 되었다는 결론이 필연적으로 도출될 수밖에 없다.” “한 때 아들은 존재 하지 않았다.”는 아리아스의 주장은 신성모독이라 하여 동방교회를 갈등의 소용돌이로 몰았고 종교적 분쟁으로 제국의 분열을 걱정한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325년 7월 4일에 현재의 터어키 이즈닉인 니케아로 3백 명의 감독들, 2천명의 장로들 및 집사들을 황궁으로 소집하여 자신을 감독이자 사도로 선포하고 회의를 주제하여 아리우스의 주장을 배격하고“아버지와 본래부터 하나”라는 표현이 추가된 니케이 신조를 탄생시킨 것이다. 이후 제국은 한동안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니케이신조가 제국의 안정을 위해서 이었다면, 칼케돈신조는 콘스탄티누스황제가 죽고 콘스탄티누스2세를 거쳐 율리아누스가 황제가 되면서 기독교를 혐오 했던 황제가 교회에서 추방된 이단의 감독을 복권 시켜 이교신앙을 부활시켜 교회의 분란을 조장하려고 하자 황제의 음모를 알게 된 동방교회는 그동안 다투어 왔던 사방교회와 다툼을 멈추었고 서방교회는 동방교회가 싫어하는 “아버지와 본질상 하나”라는 표현을 “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이 동일한 본질을 공유한 세 위격이다.”라고 한다는데 합의를 도출했고 그래서 탄생된 것이 칼케돈신조인 것이다.

 

서로 자신들의 교리가 옳다고 내세우며 싸우던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그리고 권력의 중심 황제, 서로가 자신들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편리에 위배되면 이단이라는 이름으로 귀향을 보내고 심지어는 죽음에 이르게 했던 것이 기독교의 이단의 논쟁이 아니던가?

 

이런 일도 있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대해서 있었던 논쟁이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es)인가, 아니면 인간의 어머니(anthrop-tokos)인가?”네스트리우스는 마리아의 일반적 칭호, 즉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표현을 이단적 오류라고 비난했다. 그는 자신의 현란한 말솜씨로 예수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일 뿐 아니라 완벽하게 인간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설득하려고 했다. 네스토리우스는 예수님이 두 가지 성품(하나는 인간적이고, 또 하니는 신적인)을 지녔고, 마리아는 인간의 성품을 낳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마리아를 그리스도의 어머니(Christo-tokos)라고 부르는 게 정확하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을 결국 키릴로스는 그가 예수님을 두 가지 성품으로 구분한다고 비난을 했고 둘 사이의 논쟁은 동방교회 전체가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하였다.

 

이러한 기독교의 역사를 돌아볼 때나 오늘날에 말하는 이단이라고 불리는 것도 그 옛날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과연 이단이란 무엇인가? 자신들의 주관적 입장, 자신들의 이타심에 의한 반대의 주장에 대한 것이 아니던가? 불교나 기독교나 석가의 삶을, 예수의 삶의 발자취를 본받아 따라서 살려고 노력하면서 실천하는 것이 신앙이 아닐까? 그리고 그분들이 생존에 하셨던 말씀을 마음에 받아드려서 삶에 적용하는 것이 믿음이 아닐까?

 

나는 종교에는 순기능(順機能)과 역기능(逆機能)이 있다고 생각을 한다. 순기능이란 어느 종교든지 그 종교를 통하여 자신을 돌아보며 깨우침을 얻어서 자유로워지는 것이고, 역기능이란 어떠한 종교를 믿거나 그 종교에서 내세우는 교리에 묶여서 자유롭지 못하거나 자신을 그 교리에 끼워 넣어 그 교리에 맞추어 사는 것을 역기능이라고 생각한다. 종교생활을 한다면서 교리에 억매여서 타성에 젖어 자신을 돌아보지 못한다면 그것이 종교의 역기능이요 그것을 이단이라고 본다. 종교를 왜 가져야 하고 왜 믿음 생활을 하여야 하는 가? 나는 이 답에 대하여 두 분의 글을 옮겨 본다.

 

하느님이 주시는 하느님의 생명인 얼(성령)을 공자는 덕(德)이라 하고, 석가는 법(法)이라 하고 노자는 도(道)라 하고, 예수는 얼〔靈〕이라고 하였다. 이렇듯 이름만 다를 뿐 하느님 생명인 실체는 똑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얼나로는 예수, 석가 ,공자, 노자가 하나로 같다. 얼나는 각자의 생명이 아니라 하느님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나로 솟나지 못하여 얼나를 모르는 이들은 몸나 중심으로 보기 때문에 예수 다르고 석가 다르고 노자 다르고 공자가 다른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좇는 이는 예수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석가, 노자, 공자를 믿어서는 구원을 못 받는다고 말한다. 석가를 좇는 이는 석가만이, 공자를 좇는 이는 공자만이, 노자를 좇는 이는 노자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사람들끼리 모이면 언제나 분쟁과 갈등만 일어나게 된다. 마치 어릴 때 우리 아저비가 제일이라고 우기는 것 같은 유치하기 그지없는 생각이다. 그리하여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배척하고 공격하고 반목한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교리나 신조를 믿는 타율 신앙에서 벗어나 스스로 제 맘속에 얼나를 깨달아 자율적인 신앙인 되면 그런 유치하고 폐쇄적인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보혜사(保惠師, 성령)에게서 가르침을 받으라고 하였다. 보혜사는 설령인 얼나다. 석가는 제자들에게 다르마(Dharma, 法)를 좇으라고 하였다. 다르마는 불성인 얼나다. 얼나를 깨달아 하느님(니르바나)께로 돌아가른 말이다. 요즈음 말로 예수와 석가는 신중심(神中心) 신앙을 가진 이들이다. 예수와 석가는 하느님(니르바나님)이 참 아버지요, 참 스승님이요, 참나인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것은 생각할수록 머리가 숙여지는 놀라운 가르침이요, 깨달음이다.

                                                                     「다석 마지막 강의」중에서

 

나는 다석 유영모가 말하는 것이 정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아마 기존의 교회에서는 그분의 주장에 대하여 분명 이단이라는 낙인을 찍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분명 하나님(그분은 하느님이라 표현하고 말씀하신다)은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요약해보면 이렇다. “제나는 죽고 얼나로 솟나야 한다. 그래야 하늘나라,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성경에 있는 죽을 몸을 위하여 살 것이 아니라 영생으로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에 임할 수 있다는 것으로 나는 받아 드린다.

 

종교가 어는 문화현상보다 뛰어난 것이라면, 자비의 실천인 이 나누어 가짐 때문이다. 절대적인 진리의 세계를 체험했다면 보편적인 중생계에까지 그 기량이 미쳐야 한다. 그렇지 않고 말로만 깨달았노라 자처하면서 그 기량이 중생계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그 누가 되었던 그는 가짜다. 왜냐하면 옛 부처님과 조사들이 한결같이 지혜와 자비의 그 길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깨달음이 무언지, 닦음이 뭔지도 모르면서 일상생활 속에서 인간의 선의지(善意志)를 이웃과 함께 나누어 가지는 쪽이 오히려 보다 진실한 신앙인이요, 보살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어떤 종교이건 간에 인간의 길을 위해 인간이 만들어놓은 것이라면, 인간의 삶과 이어지는 종교는 좋은 것이고, 인간의 삶을 등지거나 소홀히 하는 종교는 좋은 종교라 할 수 없다. 이 말을 바꾸어 한다면 올바른 진리는 인간의 삶으로 이어지고 진리를 가장한 거짓은 인간의 삶을 소홀히 한다.

                                                                          「버리고 떠나기」중에서

 

법정스님은 같은 책에서 “종교가 생기고 나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사람이 있고 나서, 그 사람이 만들어놓은 여러 가지 문화현상 중의 하나가 종교임을 알아야 한다. 사람의 일을 소홀히 하면서 종교만을 절대시하게 되면 주객이 전도되어 사람은 종교의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 오늘날의 종교 간의 대립과 갈등이 바로 이를 증명하고 있다.라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한통의 메일을 받고 이단에 대하여 며칠을 생각해보았다. 과연 무엇이 이단이고 무엇이 참 진리일까? 그리고 메일의 답장을 어떻게 써 보내야 할까? 그분은 민족종교로 등록되어 있는 자신이 믿는 종교를 많은 사람들이 사이비라고 말하고 있다면서 같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그 많은 종교교파가 생기는 것을 보면 기독교인 보다 자신이 예수님에 대하여 더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고 메일을 보내 왔다. 그래서 그나마 짧은 지식으로 갖고 있는 기독교에 대하여 적어 보았다. 어떠한 장황한 말보다도 다석의교리나 신조를 믿는 타율 신앙에서 벗어나 스스로 제 맘속에 얼나를 깨달아 자율적인 신앙인 되어야 한다.”는 말씀과 법정스님의 “인간의 삶을 등지거나 소홀히 하는 종교는 좋은 종교라 할 수 없다.”라는 말씀이 이단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라 아닐까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