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살아가는이야기

댓글을 보고 다시 한 번

心田農夫 2010. 4. 17. 18:53

 

〇〇〇〇선생님

안녕하세요? 우선 저의 방에 찾아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참으로 예민한 문제이지요, 이단논쟁이라는 것 저는 불교신자는 아닙니다. 종교로서의 불교는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공부를 하는 면에서 불교철학, 불교사상을 좋아 합니다.

 

〇〇〇〇선생님은

불교가정에서 태어나시고 부처님을 좋아하신다고 하시는 것을 보니 불교신자이신가 봅니다. 저는 마음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스스로 심전농부(心田農夫)라 이름을 짖고‘마음을 가꾸는 텃밭’에서 열심히 마음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농사를 지으며 때때로 행복을 연구(?)하는 사람이기도 하구요

 

〇〇〇〇선생님

기독교인하고 이단논쟁을 하시느라고 마음고생이 많으시군요. 이단 논쟁이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입니다. 이단의 논쟁의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신흥종교연구가인 ‘탁명환’(이단종파연구전문가)이란 분이 이단이라고 하던 단체의 사람에게 암살을 당하기도 하고, 이단이라는 말 때문에 종교인이라는 사람이 그 사람을 죽이는 일을 했습니다.

 

중세시대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요!”라는 구호와 겉옷에 십자가를 그려 놓은 옷을 입고 성지탈환을 위해 싸웠던 십자군 전쟁을 비롯하여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중동에서의 전쟁들 그리고 대치상황들이 다 이단의 논쟁이 아닌가요? 이처럼 이단논쟁은 개인과 개인과의 문제를 낳기도 하고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를 반목하게 합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싯다르타

부처님이나 예수님이나 어떤 교리도 만들지를 않았고, 불교의 경전도 기독교의 성경도 만들지를 않았습니다. 저는 법정스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선생님께 인용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어떤 종파적인 종교를 통해서 마침내 보편적인 종교의 세계에까지 나아가야 한다. 종파적인 종교라는 것은 나무로 치면 가지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어느 한 가지만을 전부라고 고집하면 나무전체를 알 수 없다. 종파적인 벽이나 독단적인 요소만 극복할 수 있다면 모든 종교를 하나로 보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분쟁이 일고 있는 종교적인 갈등은 종파적인 벽을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믿는 종교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 믿고 다른 종교를 무시하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

 

저 역시 스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하고 있습니다. 스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모든 종교에 독단적인 요소가 있다. 독단적이고 배타적인 요소가 끼어들면 인간 교류 자체가 불가능하다. 종교 간에 벽이 허물어지려면 우선 대화가 있어야 하고, 대화를 가지려면 독단적인 울타리를 넘어 마음을 활짝 열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모든 종교가 지니고 있는 공통적인 윤리, 공동선 같은 것이 서로 통할 수 있다.

 

우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다.” 이 말은 좁은 우물 안이 세상의 다인지 알고 넓은 세상의 형편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하는 말로서 자신의 견식이 좁음을 모르면서 저만 잘난 줄로 아는 사람을 비꼬아 하는 말입니다. 이단의 논쟁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법정스님도 모든 종파라는 것이 하나의 뿌리에서 자란 나무의 가지라고 하지 않습니까. 다석 유영모도 이렇게 말합니다.

얼나로 솟나지 못하여 얼나를 모르는 이들은 몸나 중심으로 보기 때문에 예수 다르고 석가 다르고 노자 다르고 공자가 다른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좇는 이는 예수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석가, 노자, 공자를 믿어서는 구원을 못 받는다고 말한다. 석가를 좇는 이는 석가만이, 공자를 좇는 이는 공자만이, 노자를 좇는 이는 노자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사람들끼리 모이면 언제나 분쟁과 갈등만 일어나게 된다. 마치 어릴 때 우리 아버지가 제일이라고 우기는 것 같은 유치하기 그지없는 생각이다. 그리하여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배척하고 공격하고 반목한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자신의 종교만이 참다운 종교라 하는 것은 전체를 보지 못하고 일부만 보는 좁은 안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무만 볼 것이 아니라 숲을 보아야 한다고 다석 유 영모선생님은 말씀합니다. 그리고 성인이라고 불리는 달라이 라마도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종종 어떤 종교를 믿으면서 타 종교에 대해 배타적인 감정을 느끼곤 합니다. 자신이 가는 갈만이 유일한 진리의 길이라는 감정이지요. 이런 감정을 가지면 다른 종교의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이것에서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명상적인 삶을 통해 자신이 현재 걸어가고 있는 길의 진정한 가치를 느끼는 겁니다. 그때 다른 사람의 길에서도 똑같이 소중한 가치를 발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인들은 다른 종교를 무시하고 미워하려는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을 넘어서서 조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불교를 믿는다면 여러분은 자신도 부처가 되기를 염원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를 믿는다면 같은 용어를 쓰지는 않겠지만, 대신에 여러분은 완전한 신성을 얻고 싶은 열망, 곧 하느님과 하나가 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그리고 일단 열망하는 마음이 커지게 되면, 여러분은 지신도 그런 존대 상태에 이르는 것이 가능하다는 강한 확신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세 번째 차원의 신앙입니다 저는 불교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에도 이 세 가지 형태의 신앙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달라이 라마께서도 용어가 다르지만 불교나 기독교를 같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용어라는 것은 기독교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불교의 법신, 보신, 응신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는 것을 말하는 것 입니다. 또 다르게 표현 한다면 부처님〔佛〕, 부처님의 진리 〔法〕, 그리고 그 진리를 따르는 공동체〔僧〕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각 종교에서 표현 방식이 다를 뿐 그 깊은 속의 진의(眞意)는 같다고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똑같은 하나의 물건을 각 지방마다 부르는 이름이 다른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지금 살고 있는 곳이 고향이 아닙니다. 어찌하다 보니 이곳에 정착을 하게 되었는데, 처음에 이곳에 와서 말에서 오는 느낌 때문에 무척이나 황당한 일을 겪게 되었던 적도 있지요. 예로 들어보면 약간의 의견 차이 때문에 옥신각신하던 친구가“씨급하겠네”하는 말을 하기에 욕으로 알아듣고 상대에게 나이도 어린사람이 욕을 한다고 했더니, 상대방이 어쩔 줄 몰라 하더군요. 옆에 있던 사람이 욕이 아니라며 “미치겠네. 환장하겠네,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네. 대충 그런 뜻의 방언이라고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또 하나 ‘정구지’라는 말을 무엇을 표현하는지 알지를 못했던 때가 있습니다. 저는 ‘부추’라고 듣고 자라지, ‘정구지’란 말은 이곳에 와서 처음 들었기 때문입니다. ‘정구지’나 ‘부추’ 분명 같은 것 아닙니까. 정구지면 어떠하고 부추라고 부르면 어떻습니까. 맛있게 요리해 먹고 건강에 도움이 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어떤 종파에서는 교리의 논쟁을 넘어서 예수님이 죽은 십자가 형태에 대하여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논하는 단체도 있더군요. 그 분들은 십자가가 지금 우리가 보듯 두 개의 나무토막이 가로질러서 된 것이 아니라 영어의 T 자형이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는 것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직도 예수님의 어떠한 모양의 형들에 달려 돌아가셨는지, 지금의 십자가 모양의 형들에서 인지,T 자형의 형틀에 달려 돌아가셨는지 정확한 것은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단지 1968년, 예루살렘 인근 ‘지바트 하―미브타르’라는 묘지에서 요한이란 이름을 가진 젊은 사람의 유골이 발굴되었는데, T자 형태의 형틀에 매달렸기 때문에 다리가 구부러진 상태로 옆으로 끌어올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발뒤꿈치에는 10cm가 넘는 대못이 박혀 있었다고 합니다. 이 고고학적 발굴을 토대로 그런 모양의 형틀에서 예수님도 달려 돌아가셨을 것으로 추정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이후 3세기 동안 십자가는 개인적인 헌신의 상징이었지만, 4세기에 들어서면서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주화 제작에 십자가도형을 사용하면서 대중화 되었고 그리스도의 몸이 매달린 십자가는 대략 5세기경에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교회 내부에 십자가가 장식되기 시작한 것은 13세기 무렵이었다고 합니다.

 

지금의 십자가 모양이든, T자형 모양이든 예수님이 어떠한 모양의 형틀에서 죽으셨는지가 중요한 것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이 어떤 형틀에서 돌아가셨던 그분이 왜 죽어야 했는지, 그 죽음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요?

 

그 교리라는 것, 자신들 주관적 입장에서, 인간들이 만들 것이 아니던가요? 우리는 간혹 숲속에 있음으로 인하여 숲에 가리어서 정작 산 전체를 보지 못하고 잘못 판단하는 오류를 범합니다. 이와 같이 이단의 논쟁도 같다고 봅니다. 종교적인 면에서 다시 말해보면 기독교의 ‘사랑’이나, 불교의 ‘자비’는 같은 것입니다. ‘사랑’은 가볍고 ‘자비’는 무겁다고 느끼십니까? 아니면 ‘사랑’은 넓게 생각되고 ‘자비’는 좁은 범위를 나타낸다고 생각하십니까? 불교나 기독교나 발생지역의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나름대로의 표현방식이 다른 뿐이라고 생각됩니다.

 

기독교를 종교로 택하여 믿으시는 분들, 불교를 종교로 택하여 믿으시는 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자신이 믿고 있는 그 종교에 대하여 속속들이 다 알고 있으신가요? 내가 믿는 종교에 대하여서도 다 알지 못하면서 남의 종교에 대하여 논하고 비평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교회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이 사랑이요, 이웃사랑, 용서가 아닌가요, 절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이 자비요, 보리심이요, 용서가 아닌가요? 아마도 모르긴 몰라도 그 정도 듣고 보고 배웠다면 도(道)를 이루어도 벌써 이루었을 것입니다. 도를 이루었다면 남을 비판하지도 않을 것이요, 남의 비판에 마음을 쓰지도 않을 것이다.

 

불교 경전 법구경에 “남의 허물은 보기 쉬워도 자기 허물은 보기 어렵다. 남의 허물은 겨처럼 까불어 흩어버리면서 자기 허물은 투전꾼이 나쁜 패를 감추듯 한다.”라 했고 기독교의 성경 누가복음에 “너는 네 눈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하지 않았던가. 법구경이나 성경의 말씀이 다른가? 물론 그 글을 보면 다르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전(傳)하는 의의는 같은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의 이단 논쟁은 하지를 맙시다. 지금은 서로서로를 존중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남을 볼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돌아봄으로써 자신을 닦아 나가야 할 것입니다.

 

요즈음의 많은 신앙인들을 보노라면 기복(祈福)신앙으로 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변질된 종교, 그것이 이단이 아닐까하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기독교를 믿는 동기가, 불교를 믿는 동기가, 어느 종교든지 그 종교를 믿는 동기가 복을 받기 위해서라면, 그것이 기독교이든, 불교이든, 저는 이단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기독교, 불교, 그 종교를 믿는 사람이 어떻게 믿느냐에 따라서 그 종교가 이단이 되는 것 아닌지요? 그리고 그 종교의 지도자들이 그 종교의 원래의 뜻을 왜곡하여 신자들을 기복의 신앙생활을 하도록 인도한다면 그것이 바로 이단의 종교가 아닐까요? 그러한 종교를 다 이단이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인간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짐승의 성질인 탐(貪)ㆍ진(瞋)ㆍ치(痴)라는 세 가지의 수성(獸性)갖고 태어난다고 합니다. 이 짐승의 성품을 종교의 가르침으로 통하여 깨닫고 짐승의 성품을 버리고 인간의 품성으로 살아가게 인도하여 주는 것이 진정한 종교의 의의이고 그러한 종교가 참 종교가 아닌가요? 다석 유영모의 이렇게 말합니다.

 

“일상생활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살아 있고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이 함께하면 삶 그대로가 기도요 예배하는 것이다. 사찰이나 교회 안에서 경건하고 착실한 신앙인이 밖에 나오면 신앙을 모르는 어느 사람과 다음 없다면 그게 무슨 신앙이라고 할 수 있는가.”

 

사찰이나 교회 안에서는 참인 것이 어찌 밖에서는 거짓이 되는 것인지, 이런 것이 이단적인 신앙이 아니겠습니까? 「다석 마지막 강의」에 이런 글도 있습니다.

 

“서양 신학자들이 한국의 기독교에서 기복(祈福)의 샤머니즘 냄새를 맡고, 고개를 갸우뚱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허우대만 멀쩡한 기독교이지 속을 들여다보면 거의 샤먼들의 굿판이다. 예수ㆍ석가처럼 제나를 부정하고 얼나로 부활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다.”

 

오늘날의 기독교에 대한 다석의 판단입니다. 아마 이런 신앙을 갖고 있는 기독교인이라면 이단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겠지요. 대학수학능력시험이 가까워지면 여러 절이나 교회에 가서 빌고 있는 분들, 그것도 바위에 동전을 올려놓아 떨어지지 않고 붙으면 자신의 자녀가 좋은 점수로 대학에 합격을 한다는 믿음, 대학수학능력시험 기간만 되면 많은 돈을 불전에 넣고, 헌금을 내면서 밤새워 기도를 합니다. 내 자식 높은 점수를 받고 좋은 대학에 합격하게 해 달라고 부처님께,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그러한 기도가 바로 샤머니즘적인 믿음의 산물이요, 이단의 표징이 아닐까요?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분의 잘못된 믿음이, 그런 분이 믿는 종교까지 이단으로 만드는 것은 아닌지?

 

다석 유 영모는 기도에 대하여“농부가 씨앗을 뿌리고 어부가 고기 낚을 때에도 하느님 아버지께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한다면 그대로가 기도요 예배인 것이다.”라고 합니다. 평상시의 삶을 열심히 살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것이 기도요 예배라는 말입니다.「수심결」에서 보국국사 지눌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과거의 모든 부처님들도 오직 이 ‘마음’을 밝히신 분들일 뿐이며, 현재의 여러 성현들도 또한 이 마음을 닦은 사람들일 뿐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미래에 수행하고 배울 사람들도 마땅히 이 진리에 의지해야 할 것이다.바라건대 모든 진리를 닦는 사람들이여, 절대로 밖에서 구하지 말아야한다.‘마음의 본성’은 오염되지 않으며 본래 스스로 원만하게 이루어진 것이니, 단지 ‘허망한 인연’을 떠나기만 하면 곧 항상 그대로인 ‘부처’인 것이다“

 

다석의“ 얼나로 솟나야 한다”는 것이나 보조국사 지눌스님의 “마음을 닦아야 한다.”는 말씀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길〔道〕를 깨우치라는 것이고 그 길로 인도하는 것이 종교의 사명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종교를 보면 사랑을 말하면서, 자비를 내세우면서, 그것은 구호에 그치고 자신들의 복을 달라고만 합니다. 평상시의 삶을 열심히 살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것이 기도요 예배라는 말입니다. 많은 종교인들이 복을 받기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요즈음, 나는 두 사람을 신앙생활을 통하여 이런 삶이, 이렇게 믿는 것이 참 믿음이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한 분은 후배가 한 번 읽어보라고 빌려준 책의 저자입니다. 기독교 신자로서 하나님을 믿다 예수님이 돌라가신 나이인 33세의 나이에 이승을 떠난 젊은 의사에 관한 책입니다.

 

「그 청년 바보의사」 그 책을 통하여 그 분에 대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믿는 기독교라면 이단이라 할 수 없겠지요.

그리고 한 분은 일요일에 어느 TV 방송국에서 방영하였던 프로에서 처음 알게 된 ‘이 태석신부’란 분입니다. 그 프로에서 성직자가 걸어야 하는 길과 성직자의 참 모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분이 몸답고 있던 종교도 한 때 ‘면죄부’를 신자들에게 팔았던 그 시기, 그 시기의 그러한 교리라면 이단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 출근하여 그 분의 이름으로 책의 제목을 찾았고 그 분의 책의 제목을 알았습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을 다 본 후 그 분의 책「친구가 되어 주실래요.」를 구입하여 보려고 합니다. 방영 되었던 프로를 다 보지 못한 아쉬움도 있고 조금 더 그 분이 어떠한 삶을 사시다 가셨는지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바보의사 안 수현선생님이나, 이 태석신부님이나 그리고 얼마 전 우리의 곁을 떠나신 무소유의 법정스님이나, 그분들은 자신들의 안위보다는 자신들을 희생하면서 종교의 씨앗을, 믿음의 씨앗을, 사랑의 씨앗을, 자비의 씨앗을 뿌리신 분들로 신앙이 무엇인지, 믿음이 무엇인가를 몸소 실천을 통하여 보여주신 분들입니다.

 

〇〇〇〇선생님

이단논쟁은 필요 없는 소모전이라는 것이 저의 입장입니다.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얼음은 물이다, 아니다. 창조설이 맞다, 진화설이 맞다. 안식일이 일요일이다, 아니다. 성탄절이 정말 예수가 탄생한 날이다, 아니다. 그리고 한때는 천동설이다, 지동설이 맞다 하는 논쟁도 있었고, 한 때 상투를 자르라는 단발령에 대해서 상투를 자르는 것을 치욕으로 알고 스스로 자결을 하던 유림들도 있었습니다. 천동설이나 단발령 지금 생각하면은 참으로 어이없는 일 아닌가요? 이단의 논쟁도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이 나보고 이단이라고 한다면, 한번 쯤 숲속에서 나와서 산을 보는 지혜도 겸비한다면 어떠할는지요? 주관적 입장이 아니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냉철히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도 자신에게 확실한 믿음을 주는 것이고 그것이 누가 무어라고해도 확실한 믿음을 다지는 계기가 되기도 하겠지요.

 

이 세상 어떻게 똑같은 사고(思考)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 믿음ㆍ소망ㆍ사랑 중에 제일이 사랑이라 하던데,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도 있던데,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 그것은 혹 내가 믿는 종교관에서 보면 이단이라고 느껴지겠지만, 그렇다면 비난하기 이전에 그런 분들을 위해 기도해주는 것이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 아닌가요? 불교역시 나보다는 상대를 이해하고 도와주는 것이 보시(布施) 사상이요 , 자비가 불교의 종교관이 아닐까요? 혹 나와 다른 종교를 믿으며 신앙생활을 한다고 비판을 하는 것보다는 저러한 믿음도 있겠구나 생각을 하고 혹 이단이라고 느껴진다면 비판을 하기에 앞서 잘못된 신앙생활에 대하여 바른 길로 갈도록 그분을 위해서 기도를 해주시는 것이 신앙인이요 믿는 자의 사명이 아닐는지? 너는 이단이니까 욕을 해도, 댓글로 모욕을 주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의 빛, 부처님이 보여 주던 자비의 빛을 가리는 것이 아닌지 생각을 해보아야 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자식을 죽인 살인자를 용서하던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 자식을 죽인 사람을 용서 한다는 것 그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일까요? 그럴 수 있는 것이 신앙의 힘이요 그것이 믿음 아닐까요??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견유학파는 시가지를 돌아다니면서 철학을 논했고,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소유학파는 숲길을 산책을 하면서 철학을 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이단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사이비 철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견유학파나 소유학파 다 철학의 한 분파 일뿐, 이단 철학이란 없습니다.

 

저 깊은 바다 속을 헤엄치다 잡힌 물고기가 있습니다. 유자망에 잡힌 고기는 그물 태, 또는 망태(網太)라 부르고 연승으로 잡은 고기는 낚시 태라는 이름으로 부른답니다. 그리고 잡히는 시기에 따라 겨울에 잡힌 고기는 동태(凍太), 요즘 같은 시기인 3~4월 봄에 잡힌 고기는 춘태(春太)라 하고 그 외 선태(鮮太), 북어, 명태, 황태, 그 이름도 여러 가지입니다.

동태라고 불린다고, 북어라 불린다고, 명태라 불린다고, 황태라 불린다고 그 고기가 다른 고기인가요? 어느 이름으로 불리어지든 그 고기는 그 고기 일 뿐입니다. 이단의 논쟁도 이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요? 이왕 말이 나왔으니 그 명태를 주제로 한 가곡에서 기독교의 사랑과 불교의 자비를 배워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가곡 명태의 가사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에지프트의 왕처럼 미이라가 됐을 때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늦게 시를 쓰다가 쐬주를 마실 때,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짝악 짝 찢어지어 내 몸이 없어질지라도 내 이름만 남아 있으리라 명태, 명태라고 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

 

신앙인들이 미물이지만 그 물고기에서 배워야 할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몸이 찢어져서 자신의 몸이 없어질지라도 가난한 시인의 안주가 되겠다는 것, 그리고 이름만 남아 있겠다는 것,” 신앙인들이 배워야 하지 않을까요? 내 몸을 아끼지 말고 외롭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자비를,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것, 그것이 종교를 가진 신앙인이 해야 하는 사명이 아닌가요?

 

샨티데바의 「입보리행론」에 보면누가 자기를 비난하면 기분 나빠하고 누가 자기를 칭찬하면 기분이 좋아할까? 비난과 칭찬은 빈 동굴 메아리같이 빈말이거늘”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임제 선사께서는 “그대가 바른 견해를 얻고 싶거든 타인으로부터 미혹을 받지 말라. 안으로나 밖으로나 만나는 것은 모조리 죽이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라를 죽이고, 아라한(성인)을 만나면 아라한을 죽이라.”했다고 합니다. 이 말은 교리에 억매이지 말라는 말일 것입니다. 즉 그 교리에 의해서 우리가 부자유하다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법정스님의 말을 인용 해봅니다.

 

“종교가 생기고 나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사람이 있고 나서, 그 사람이 만들어놓은 여러 가지 문화현상 중의 하나가 종교임을 알아야 한다. 사람의 일을 소홀히 하면서 종교만을 절대시하게 되면 주객이 전도되어 사람은 종교의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 오늘날의 종교 간의 대립과 갈등이 바로 이를 증명하고 있다.”

 

〇〇〇〇선생님,

신이 인간에게 두 귀를 준 것은 한 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리라는 것이라고 합디다. 이단이라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반응한다면 선생님만 힘들고 짜증나고 화가 날뿐입니다. 상대가 무어라 해도 못 들은 척 묵묵히 내 신앙의 길을 걷는 것, 그것이 신앙생활을 하는 하나의 방법이요, 수련의 길이 아닐는지요?

 

교리, 그 교리로 이단이다 아니다. 작은 땅덩어리인 우리나라 그것도 두 동강이 나서 남(南)이다, 북(北)이다, 동(東)이다, 서(西)이다 하는 이 마당에 참을 찾고자하고 진리를 탐구하겠다는 종교인이요, 신앙인이라면 나는 참이고 너는 이단이라고 서로 헐뜯고 상체기 내는 일은 그만 두는 것이 종교인들이요, 신앙인들이 지향해야 일이 아닐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