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살아가는이야기

고작 2년하고 6개월일세.

心田農夫 2010. 8. 20. 17:10

죽음이란 무엇일까?

나는 어려서부터 이 화두에 대하여 때때로 생각을 하며 살아왔다.

애드가 모랭은 자신의 저서인 「인간과 죽음」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죽음은 인간을 동물과 동일시시켜 주는 것이기도 하고,

또한 동물로부터 인간을 구분지어 주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생명체처럼 인간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만이

예외적으로 저세상에 대한 믿음으로 죽음을 부정한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들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알고 있는 죽음이 나만은 피해가리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자신도 언젠가 죽음이 자신에게 찾아오리라 생각을 한다면

살아가면서 올바른 말과 올바른 행동을 하리라 사려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산도 언젠가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죽음을 생각 한다면,

남에 죽음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함부로 말을 하지 않으리라,

 

이러한 생각은 정신의학자이며 호스피스의 선구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말에서도 알 수 있다.

 

인간의 무의식중에 자기 자신에게는 죽음이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확신이 있다는 기초 지식으로 설명된다. 인간의 무의식에서는

현세의 우리 생명에 실제로 종말이 일어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러고 우리 생명이 끝나야 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외부의

누군가에 의한 악의적 개입에 의한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 인간은 피살될 뿐이다. 자연사니 노령에 의한 죽음이라는 것은

상상이 안 된다. 따라서 죽음은 곧 살(煞), 두려운 사건, 응보(應報)를 연상시킨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인간의 죽음」중에서

 

내 이렇게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은 죽음이란 어떠한 죽음이든

우리는 그 죽음 앞에서는 슬픈 마음으로 조심스럽고 겸손하여지는 것이

올바른 행동이기 때문이요 그것이 같은 인간으로서 도리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상가(喪家)집에 갈 때도 조의(弔意)의 예(禮)를 갖추어

검정 옷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겸손한 자세로 화자(化者)에게

정중한 마음으로 흰 국화 한 송이 영전에 받치고 조의의 예를 올리는 것이리라.

 

지금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화자(化者)에 대해 화자(話者)되는 것을

보면서 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글을 써본다.

 

세월의 흐름이라는 것을 우리는 멈출 수가 없다.

그 세월에 따라서 태어났는가 싶은데 어느덧 백발을 가져다주고

어느 날 불시에 육으로부터 영혼을 분리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다.

 

누구나 그런 순간을,

어느 누구라고해도 피해 갈 수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는 머리 숙이고 자신을 최대한 낮추는 것이리라.

그리고 어떠한 죄를 지었다고 해도 그 죄를 지었던 사람이 죽음에 이르며

그 죄도 더 이상 묻지를 않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같은 것이리라.

 

그런데 그 분이 죄가 있는지 없는지 솔직히 나는 모르겠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그래도 한 시절 우리나라의 우리들의 대통령으로서

나라를 다스렸던 분이었고 국민들의 슬픔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승을 떠나서 그 누구도 산자는 가보지 못한 저승으로 가신 분이다.

 

내가 그분이 죄가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는 것은

그 사건을 조사하던 검찰에서 그 분의 돌아가심으로

수사를 종결하지 못하고 중단하였다는 것이 결론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접어둔 사건이요 그렇게 마무리 된 사건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들의 역사가에 손에 의하여 역사에 기록되리라는

것 밖에는 그분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리라.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신 지가 일 년이 넘었다.

대통령을 그러게 잃은 것은 그 분의 가족들만의 슬픔이 아니요

대한민국의 슬픔이요, 이 나라의 백성의 슬픔인 것이리라.

 

그리고 그 슬픔에 대하여 역사가들은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리라.

그러한 일을 그것도 일 년이란 세월이 지난 일을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 어떠한 근거에 의하여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었을까? 그리고 그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명예욕이, 권력욕이, 총수의 자리가 그리도 탐이 나더란 말인가?

 

사람은 언제가 죽은 것이고

그 어떠한 명예로도, 권력으로도 그 죽음을,

즉 자신의 죽음은 막지를 못한다는 것은 사실이요.

영원한 진실인 것이다.

 

진시황제가 불로초를 찾아서 먹고 영원히 살겠다고 한 것처럼

청장의 자리에 올라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다고 한다면

돌아가신 전직 대통령에 대한 허위사실을 유포하여서라도

그 자리에 올라가겠다는 그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 할 수도 있으련만,

 

나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인간이란 존재가 사리사욕에 의하여 손바닥 뒤집듯

자신의 이익과 명예와 권력에 의하여 배신을 한다고 하여도

한때는 자신의 최고의 상관이었던 전직 대통령이 아니었던가.

 

그런 분을 생존에 있는 것도 아닌 돌아가신 분의 명예를 훼손하고도

너무도 당당하신 것 같은 그분에 대하여 참으로 실망스럽고 아울러

그런 사람이 치안을 담당하는 이 나라에 산다는 것이 참으로 슬프다.

 

나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말을 빌려서

불쌍한 영혼의 소유자, 무지한 그 사람에게 한마디 가르쳐주고 싶다.

 

뭐든 영원히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다.

또한 모든 걸 다 이룰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머리는 이 진실을 마음에게 전해주지 않는다.

아쉬움은 마음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며, 더 많은 것을 갈망하는 것이고,

항상 더 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한다. 아쉬움은 항상 과거에 속한다.

그리고 잔인하게도 죽음은 아쉬움에 더 집착하게 만든다.

시간이 영원할 거라는 착각에 서로의 소중함을 일찍 깨달지 못한다.

잃은 것을 진실로 깨닫게 되는 죽음 앞에서 그 가치는 더욱 커진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상실 수업」중에서

 

퀴블러 로스는 말한다.

뭐든 영원히 소유 할 수는 없다는 것을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다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시간이 영원할 거라는 착각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는 것을,

 

거기에 산이 있어 오르면 반드시 내려와야 하고

꽃이 피면 반드시 그 화려함을 뒤로 하고 시들어서 떨어지고

인간을 태어났으므로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인 것이다.

 

얼마나 호의호식하고 잘살 거라고,

얼마나 큰소리치면 땅땅거리고 살겠노라고

죽은 분까지 욕되게 하면서 까지 총수의 자리에 오르겠다고

하늘 무서운지 모르고, 많은 사람들에게 욕먹으면서도

못 물러나겠다고 몸부림치는 어리석고, 불쌍하고, 가여운 사람아!

 

그대께서 그렇게 오르고자 한 그 자리,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 하늘을 속이면서,

세상이 욕하는 것을 모르는 채 당당한 척 오른다고 해도,

국민을 거짓말과 눈속임으로 속이고 청문회를 거쳐서 오른다 한들

그 총수라는 자리, 영원할 것 같고 길 것 같아도 고작 2년하고 6개월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