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에 대하여 생각하기

문화체험-이육사문학관 견학

心田農夫 2010. 11. 27. 17:21

 

학교 앞을 오전 8시에 출발하여 중간에 휴게실도 들려 잠시 쉬기도 하면서 3시간여 만에 버스는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백운로 525에 위치한 이육사문학관에 도착을 했다. 버스에서 내려서 인솔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문학관을 들어가 이육사님이 쓰던 안경을 비롯하여 친필원고, 손수 쓰신 편지원본, 출판되었던 시집 그리고 이육사의 부고 등을 살펴보고 2층으로 올라가 일생을 재구성한 10분 정도의 육사의 일대기 영상자료를 보았고 끝나고 나서 이육사의 따님인 이옥빈여사의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이옥빈여사는 70세의 나이로 직접적인 아버지와 추억은 희미하다고 말씀하시며 삼촌들과 어머니를 통하여 들었던 아버지 이육사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을 하여 주었다. 특히 할머니께서는 아버지와 삼춘들에게 늘 “언행일치 지행일치” 하라고 가르치셨고 “술, 담배는 형제가 모여서 피우고 마셔라.”라는 말씀으로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해야 한다는 교훈을 형제들에게 심어주셨다고 말씀하시며, 여사께서는 “아버지의 사랑은 못 받은 대신 이곳을 찾아 주시는 분들이 많은 사랑을 주셔서 사랑은 먹고 사는 여인입니다.”라는 말씀으로 방문객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것을 끝으로 아버지 이육사에 대한 설명을 마치셨다.

 

 

   <민족시인, 저항시인 이육사의 모습>

 

이육사(李陸史)ㆍ문학로드 안내

 

 

시인ㆍ독립운동가(1904.4.4 ~ 1944.1.16)

: 육사 본명 : 원록(源祿)

작명 : 활(活) 출생 : 경북 안동

 

 

 

조부 치헌 이중직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보문의숙을 거쳐서 도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21년 결혼 후, 백학학원에서 수학하고 9개월간 교편을 잡았다.

1924년 4월 일본으로 유학했다가 관동대지진을 겪은 후 귀국하여 대구에서 조양 회관을 중심으로 문화 활동을 벌였다.

1926년부터 중국 북경 등지에서 유월한국혁명동지회에 참가해 조직 활동을 펼쳤다.

 

1927년 여름에 조재만과 동행해 귀국했으나 장진호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1년 7개월간 옥고를 치렸다. 그 때의 수인번호 이육사(二六四)를 따서 호를 ‘육사(陸史)’로 지었다.

 

1930년 중외일보 기자로 재직하면서 젓 시「말」을 발표했고 이후 총 39편의 시를 남겼다.

이듬해에 북경과 남경에 머물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의열단에서 설립한 조선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에 1기생으로 입교해 6개월 과정을 마쳤다.

 

1943년 중국으로 갔다가 귀국, 이 해 6월에 체포되어 북경으로 압송, 이듬해 1월 16일 마흔의 나이에 북경주재 일본 영ㅇ사곤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끝까지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죽음으로서 일제에 항거한 시인으로 목가적이면서 도 강인한 필치로 민족의지를 노래했다.

 

1968년 대통령표장, 1977년 건국포장,1983년 문화훈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등이 수여되었다

 

 

이육사문학관을 다녀오고 며칠 뒤에 이런 뉴스를 들었다. 지난 9월1일부터 10월 7일까지 한ㆍ미ㆍ중ㆍ일 4개국 청소년 3200면(국가별 600명)을 대상으로 국가관 및 보훈의식, 역사관, 국제관계 등 4개 분야 23개의 항목에 대한 청소년의식 비교조사를 국가보훈처에서 (주)동서리서치에 의뢰하여 실시했단다.

 

이 조사에서 우리청소년들의 ‘국가 자긍심’은 62.9점으로 일본 55.3점에 비해 높기는 해지만 중국 84.2점, 미국 70.6점보다 낮게 나타났다. 그리고 ‘국제적 지위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도 62.4점으로 미국83.5점, 일본 74. 중국 72.7점에 비해 가장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전쟁발발시 참전의지’를 묻는 질문에는 56.6점으로 중국에 이어 2번째로 높았고 ‘국가위기 시 국난극복 의지’65.0점으로 중국ㆍ미국에 이어 3번째를 차지했단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러한 청소년들이 이육사를 비롯하여 애국지사들의 독립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 설문조사에 참여하였다면 어떠한 결과가 나왔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육사와 독립운동

 

독립운동가 이육사 : 육사는 친가와 외가에서 익힌 항일민족정신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독립운동 대열에 참여하게 되었다. 육사는 조선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에 입교하면서 소극적 자세를 벗어나 실천적 행동을 바탕으로 한 무력운동으로 독립의지를 구체화시켰다. 일제의 강압적인 탄압과 숱한 옥고를 치르면서도 독립운동을 포기 하지 않았고, 민족해방과 조국광복의 투철한 의지를 굽히지 않고 항일 저항투쟁을 전개했다.

 

조선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 : 조선군사간부학교는 향일독립단체 의열단이 1932년 남경교외에 설립한 군사학교이다. 조선의 절대독립과 만주국의 탈환을 목적으로 세워진 이 학교에서 육사는 1932년 10월 20일부터 1933년 4월 20일 까지 6개월간 재학해 1기로 졸업했다.

 

이육사의 감옥생활 : 육사는 일제에 의해 총 17번 검거되어 수감생활을 했다. 1927년 ‘장진홍 의거’에 연루되어 처음으로 수감되었는데 그때 대구감옥의 수인번호 이육사(二六四)를 필명으로 사용하면서 본명보다 ‘육사(陸史)’로 알려지게 되었다. 평생 모진 고문과 수형생활에 시달리다 결국, 1943년 체포되어 북경으로 이송돼 1944년1월 순국했다.

 

장진홍 의거 연루 : 1927년 10월 18일 항일지사 장진홍은 조선은행 대구지점(중앙로)을 폭발물로 공격했다. 사건 직후, 일경은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반일인사들을 잡아들여 검거, 투옥했다. 이 과정에서 육사를 비롯하여 원기ㆍ원일ㆍ원조 등 4형제가 함께 검거되어 1년 7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ㆍ

 

대구격문사건 : 대구에서 1930년 11월 일본을 규탄ㆍ배척하는 격문이 나붙고 거리에 뿌려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중외일보 기자로 근무하고 있던 육사는 이 사건의 배후조종자로 지목되었다. 신문기자로 활동하던 육사가 배달원을 시켜 격문을 거리에 붙이게 한 것이다.

 

군사정치 간부학교 입교와 활동 : 육사는 1931년에 중국에 가서 의열단 단원인 윤세주와 만나, 1932년에 그의 권고로 의열단에 설립한 조선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에 1기생으로 입교했다. 그 곳에서 교양과목으로 정치학, 사회학과 철학 등을 배웠고 그 외 군사학, 통신법, 폭탄 제조법, 피신법, 암살법 등을 교육받았다.

 

문학 활동으로 저항 : 1930년에 접어들면서 육사는 실력 투쟁의 길을 얼마간 완화했다. 이 시기부터 육사는 시, 소설, 수필, 평론 등 문학의 전 양식에 걸친 작품 활동에 들어갔다. 1931년 조선일보 대구지국으로 옮긴 이후, 사회비평을 병행함으로써 대중을 계몽, 각성시키려고 노력했다.

 

무기 반입을 위한 북경행과 순국 : 1943년 육사는 국내의 항일 조직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자 국내에 무기반입을 시도했다. 그러던 1943년 7월에 모친과 형의 소상(小祥)에 참여하기 위해 귀국했다가 검거되어 생의 마지막 길을 떠났다. 1944년 1월 16일 북경 일본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한 것이다.

 

 

학생들뿐 아니라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육사하면 그의 대표시라 할 수 있는 ‘청포도’ ‘광야’ ‘절정 대하여 알고 있으리라. 그러나 그의 시를 외우고 음미하면서, 그의 삶에 대하여, 그의 독립운동에 대하여 우리는 생각을 할까? 아마 ‘아니오. 가 그 답이 아닐까. 특히 학생들은 시험을 위해서‘청포도’ ‘광야’ ‘절정’이란 시에 대하여 분석하며 공부를 하는 것이 다이리라. 그리고 시험이 끝나면 더 이상 기억하지 않고 다 잊고 말 것이다.

 

 

청포도

            이 육 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횐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며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절정(絶頂)

                 이 육 사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것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광야(曠野)

              이 육 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 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여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번 이육사문학관을 견학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문학관에서 방영하는 이육사의 일대기를 재구성 한 영상물을 국어시간에 이육사의 시에 대하여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영상자료를 보여 준다면 좋지 않을까. 10여분의 짧은 영상물이지만 학생들에게는 산교육이 되지 않을까?

 

 

이육사의 문학세계

 

문학의 세계 : 육사의 사회활동은 민족해방 투쟁을 시작하였고, 그의 문학 활동은 그 후에 이루어졌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육사는 모국어를 부려서 쓰는 시인으로 등장 했다. 그의 시는 처음, 사물과 세계를 어두운 색조로 노래하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바닥에 깔았다. 이와 병행하여 수필, 문예비평, 사회비평에도 손을 댔다.

 

문학 활동가의 시대 상황 : 육사는 1930년대 일제의 무단 총독 정치가 극성을 띨 때 문학 활동에 나선 민족 시인이다. 이 무렵 일본은 민족침략 후 우리민족 고유한 성명을 일본식으로 고치라는 창씨개명과 조선어 사용을 금지하는 국어상용령을 공포했다. 칠흑같이 어둡고 긴 밤과 같은 시대에 육사는 민족투쟁의 방책을 모색하며 나라와 거레에 대한 충정을 보였다.

  

문학의 의의 : 육사의 시와 문학은 출발에서부터 인간과 시대상황에 상관관계를 맺고 이루어졌다. 실제행동에서 육사는 민족운동에 정진한 투사다. 정치에 시와 문학을 수용할 줄 알았고, 시와 문학에 역사와 현실을 저며 넣을 줄 안 전인격적인 문학가였던 것이다. 육사는 한국 현대문학사와 민족해방 투쟁사의 영공(領空)에 걸린 높은 별자리이며, 푸르고 청정한 강줄기다.

 

 

초인(超人)의 시

 

시세계 : 초기 작품에서 육사는 침울한 정신세계를 추상적인 말로 노래했다. 그에 해당하는 작품이 「황혼(黃昏)」, 「교목(喬木)」, 「호수(湖水)」등이다. 중기에 접어들면서 육사의 시는 인간과 세계의 여러 현상에 관심의 손길이 뻗쳐지는 것으로 변모되었다. 일제 암흑기의 막바지에 이르러 반제ㆍ저항의 의지를 담은 것이 되었다. 「절정(絶頂)」, 「광야(曠野)」,「꽃」등이 이에 해당한다.

 

시의 서정성 : 어느 시기에 이르기까지 육사의 시는 쇳된 목소리를 담기보다 서정적으로 인간과 세계를 노래하는 쪽이었다. 그의 많은 작품들은 우리 주변의 여러 사물에서 제재를 택하였다. 그 밖의 어떤 작품에는 고향을 떠나 일본과 중국 등지에서 본 이국정취를 바닥에 깔기도 하였다. 또한 그의 일부 시에서는 동ㆍ서양의 이미지가 교직상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시의 흐름 : 최초에 발표된 육사의 시는 「말」(『조선일보』. 1930)이며, 그 후 「춘수삼제(春愁三題)」,「황혼(黃昏)」등을 거치면서 육사는 한국 시(『자오선子午線』, 1937)」는 인생의 단면을 떠가는 배에 대비시킨 작품이다. 「초가(草家)」(『비판(批判)』, 1938)는 고향의 전경을 시각적으로 포착한 서정시이다.「강 건너간 노래」(『비판』, 1938)는 화자가 그의 신선한 생활을 가냘픈 목소리로 담아낸 노래이다. 1939년에는 「연보(年譜)」(『시학(詩學)』), 「청포도(靑葡萄)」(『문장(文章)』)와 같이 서정의 밀도가 앞선 작품들 보다 더욱 더 높아진 시들이 발표되었다.

 

전 양식에 걸친 작품 활동 : 육사는 시 뿐만 아니라 소설, 수필, 평론 등 문학의 전 양식에 걸친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1931년 조선일보 대구지국으로 옮긴 이후, 사회비평을 병행함으로써 대중을 계몽ㆍ각성시키려고 노력했다. 육사가 1934년부터 발표한 수필은 1924년까지 충 15편으로 밀도 높은 정서를 보여주고 있으며, 사회비평 8편을 비롯해 문예비평 8편을 내놓아 두렷한 사회의식을 드러냈다.

 

 

얼마 전에 있었던 노벨문학상 후보에 우리나라 고은시인이 올랐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하였으나 이번에도 수상을 하지 못하고 후보에 머물고 말았다. 그 후 들으니 노벨상 수상을 위해서 연구자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하겠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몇 년 전인가 서울대학교에서는 노벨상10년 프로젝트를 새웠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은 것 이외에 우리나라는 어떤 분야에서도 노벨상을 받지를 못하다보니 이러한 계획을 세우는 것이리라.

 

창작은 모방에서 나온다고 하던가? 우리나라 중학학생, 고등학생들은 대학입학만을 위한 공부를 하다 보니 국내와 세계적으로 훌륭한 책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 접한다 해도 읽어 볼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것이 우리의 교육현실이다.

 

대학교란 자신의 선택한 전공학문을 연구하는 곳이 아닌가, 그런데 문과를 선택한 학생들이 수리와 미적분, 통계를 공부를 해야 한다. 그것도 잘 해야 원하는 대학에 들어갈 수가 있단다. 그리고 이과를 선택한 학생들도 대학에 가면 하지도 않을 공부를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 너무도 많은 시간과 에너지 쓰고 있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고 답답하기만 하다.

 

하늘에 별을 보아야 천체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 관심이 천문을 연구하는 천문학자가 나오지 않겠는가, 국내에 있는 좋은 작품들과 세계적으로 훌륭한 문학작품을 많이 접하다 보면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훌륭한 작가, 작품이 우리의 청소년들 속에서 나오지 않을까?

 

한창 꿈을 피워야 할 십대학생들이 교과서와 참고서를 보기에도 빠듯한 우리의 교육과정은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볼 시간이 없는 것이 우리의 교육의 현실이 아닌가? 이러한 교육현실에서 노벨 수상할 수 있는 훌륭한 사람이 나올 수 있을까?

 

 

이육사 문학관 소개

  

1층 : 육사의 생애와 문학세계, 독립운동의 자취를 다양한 방법과 매체로 구성 하였다. ‘생애’코너에서는 동선을 따라 그의 삶의 여정을 엿볼 수 있고, 문학세계에서는 육사의 시, 소설 수필 등 다양한 문학 장르를 접할 수 있다. 독립운동 코너에 들어서면 육사가 걸었던 항일운동의 가시밭길을 느껴볼 수 있다. 또 일생을 재구성한 영상자료 상영(그날은 2층에서 상영하고 있었다) 및 작품 발표책자, 육필원고, 시집 등 문학적 자료가 전시되고, 육사의 감옥생활과 조선 군사간부학교 훈련 모습을 재현 한 모형을 만날 수 있다.

 

2층 : 문학 건물은 나서면 전원을 만끽할 수 있는 공간이 펼쳐져 있다. 문학관 주변은 연못과 분수대, 육우당(생가 모형), 청포도 샘과 청포도 밭, 야외학습광장, 이육사 동상 등이 있어 육사의 정취를 즐기기에 충분하다. 이육사 문학관은 일반인에게는 물론이고, 청소년들도 쉽게 체험하면서 배울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육사 문학관은 삶과 드높은 민족의식을 지닌 육사의 문학세계를 연구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아 갈 것이다.

 

 

현재의 우리의 공교육은 대학입학만을 위한 교육으로 국어, 영어, 수학을 위주의 중점교육을 하면서 우리의 역사인 국사, 그리고 도덕, 윤리 등의 과목은 점점 시간이 줄어들고 있고 일부 사립학교에서는 아예 그 시간에 다른 수업을 한다고도 한다. 국사수업이 줄어드니 제대로 된 역사의식이 없고, 윤리, 도덕수업이 줄어들거나 하지 않는 학교가 있단다.

 

그러다보니 부위자강(父爲子綱)이요.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 했거늘, 아버지의 꾸지람에 집에 불을 지르고, 어머니의 꾸지람에 자신을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어머니를 해코지하는 인륜을 무시하는 청소년의 범죄가 발생하는 것이고 이러한 현상이 사회의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닌가.  

 

이번 이육사문학관 견학은 학생들이 교실을 떠나서 현장에서 실제체험을 통하여 문학관, 역사관, 국가관을 새롭게 배우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앞으로 이런 현장교육이 많이 늘어나는 우리의 교육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면서 이육사문학관을 뒤로하며,「왜 도덕인가?」의 저자의 마이클 샌델의 말을 되뇌어 본다. “공교육의 목적은 제대로 된 시민을 길러내는 것이다.”

 

                                                                      <문학관 입구 한 쪽에 자리한 안내도>

                                                                            <이육사문학관 오는 길 안내지도>

                                                                                     <문학관 벽면의 일부 모습>

                                               <문학관 벽면에 있는 육사의 독립운동 이동경로>

                                                                             <이육사의 옥중생활 모습의 모형>

                                                                                                    <이육사의 친필>

                                                                                                 <이육사의 친필>

                                                                                          <이육사의 친필> 

                                                                             <이육사의 친필>

                                                                 <이육사 친필의 편지 봉투>

                                                                       <이육사 친필의 엽서>

                                                                 <문학관 내부 벽에 붙어 있는 청포도 시>

 

                    <이육사 문학관 관장님이 영상물 상영전에 설명하시는 모습>

               <영상물 상영 후 이육사 따님인 이옥빈 여사의 아버지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

 

 

                                                                 <생존에 써던 육사의 안경> 

 

                                                        <이 육사부인 안일양 여사의 사진>

                                                                                           <이육사 생가의 사진>

                                            <문학관 이층 한 쪽에 있는 책꽂이의 책들>

                                                                                                   <진열된 책들>

                                               <벽에 걸려있는 시  '광야 '를 적은 액자>

                                           <청록파 시인의 한 분인 박목월의 시 '나그네' 친필의 시>

                                                                                                     <육사의 시집>

                                                                                     <육사가 즐겨 읽던 책들 >

                                                                  <문학관 벽면의 한 모습>

                                                                                                        <육사의 시>

                                                                                          <죽남유고 상. 중. 하> 

                <문학관 나서기 전에 찍기 싫다는 딸을 육사의 흉상 옆에 세우고 한 컷 촬영>

                                                                <인솔 선생님과 학부모들 그 속에 청일점> 

                                                            <문학관을 나서며 단체사진을 촬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