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에 대하여 생각하기

문화체험-이문열 생가 견학

心田農夫 2010. 12. 28. 12:20

 

이육사 문확관을 뒤로 하고 다시 버스에 올라서 한 시간여를 달려서 물박물관이 있는 안동호 주변 식당가에 도착하여 한 식당으로 들어가 간고등어를 곁들인 점심식사를 하였다. 점심 식사 후 식당앞 주차장 옆의 물박물관을 들려 보고 싶었으나 바쁜 일정이라 사진 몇 장 찍고는 다시 버스에 타고 이문열 생가를 향하여 출발을 하였다.

 

 

 

 

 

 

경북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 두들 마을은 영양군의 동남부에 위치, 지역의 대부분이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지형이다. 두들이란 마을이름은 언덕위에 위치한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두들 마을을 보려면 관노산을 올라야 한다. 그곳에서 풍수적 관점에서 산 아래에 펼쳐진 국세를 본다.

 

두들 마을은 광노산(匡盧山)을 주산으로 중출맥한 용맥이 수천평의 용신명당(龍身明堂)을 만든 후 흘러내려 마을의 터를 만들었다. 이 마을 사람들이 뒷재라고 하는 이 용신명당은 물 없는 명당(明堂)이요 힘이 뭉쳐진 도두(倒頭)요 혈처(穴處)다. 그러나 재령 이(李)씨들은 이 명혈(名穴)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특정인이 좋은 기운을 독점하지 않고 많은 후손들이 골고루 생기를 나누어 가지려는 혜안이 돋보인다. 그래서 용신명당 위엔 아무것도 짓지 않았다. 그 주위의 경치가 매우 아름답고 전망(前望)에는 두들 마을 고가 수십 채와 대촌(大村)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한참을 달려서 이문열 생가가 있는 두들 마을에 도착하여 마을 입구의 주차장에 버스가 도착했다. 우리일행이 버스에서 내리니 두들 마을에 사신다는 문화해설사 선생님이 우리 일행을 기다리다 반갑게 맞아 주였다. 문화해설사 선생님은 주차장입구에 서있는 커다란 안내 간판 앞에서 안내도를 가리키면서 우리들이 들러볼 곳을 상세히 설명하여 주셨다.

 

 

 

 

 

 

 

 

 

문화해설사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주차장을 나서는데 주차장 입구에 서있는 두들 마을이란 입간판 앞에 서시더니, ‘두들 마을’이란 이름에 대하여 설명을 하여주셨다. 두들 마을 이란 언덕위에 위치한 한 마을 이란 뜻이란다. 설명을 마치시고 문화해설사 선생님이 앞장서 걸음을 옮기시고 우리들은 뒤 따라갔다. 먼저 도착한 곳은 ‘석천서당’이란 간판이 달린 고택의 마당으로 우리를 안내하여주셨다.

 

 

 

두들마을에는 조선시대에 나라에서 세운 광제원(廣濟院)이 있었다. 광제원은 사람들의 복리를 위하여 세운 것으로 주로 의료문제를 효과적으로 풀기 위하여 둔 기관이다. 공식적으로는 조선조 고종 무럽에 세운 것이니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다. 그래서 두들에 위치한 원이 있던 마을이라고 하여 원두들 원리라 부르게 됐다.

 

원리는1640년 석계 이시명 선생이 병자호란을 피하기 위해 이곳으로 들어와 개척한 마을로 그 후로는 석계선생의 후손들인 재령이씨(載寧 李氏)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왔다. 이 마을 옆 둔덕에는 석계선생의 서당인 석천서당이 남아있으며 마을 앞을 흐르는 화매천변에 서있는 암석들에는 석계의 아들인 항재 이숭일 선생이 새겼다는 동대 서대 낙기대 세심대 등의 글씨가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있다.

 

석천서당 앞마당에서 위와 같은 석천서당의 유래를 문화해설사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다. 특히 석천서당이란 현판의 ‘석’자의 한자 위에 점이 있는 것은 글에 멋을 더하기 위해서 점을 찍은 것으로 특별한 의미는 없다는 설명도 하여주셨다. 설명을 마치신 선생님께서는 서당을 돌아보고 사진도 찍으라고 하시면 한참을 기다려 주셨다. 나는 서당마루에 올라 방의 문도 열어 안을 들려다 보고 마루 벽 위에 결려 있는 뜻을 알 수 없는 글들도 촬영을 하고 안 찍는다는 딸을 세우고 찰깍 한 컷 찍었다.

 

 

 

 

 

 

 

 

 

 

이 마을에는 모든 여성들에게 길이 사표가 될 정부인 안동 장씨의 자녀교육에 대한 전범(典範)과 부덕(婦德)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인동 장씨는 석계 이시명 선생의 부인이다. 장씨 유적비는 1989년 10월 건립한 것으로 비문은 전 국사편찬위원장 박영석이 짓고 장상조씨가 썼다. 유적비의 배면에는 부인의 대표적 한시 소소음(蕭蕭吟)이 각인돼 있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둔덕에 자리한 큰 비석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여 주셨다. 그 비석은 궁중요리 서책을 쓴 안동 장씨의 비석이라 한다. 세월은 흘러 옛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낙엽이 쌓여가는 가운데 우뚝 서있는 비석만이 옛사람이 이곳에 살았음을, 그리고 그 사람들의 살면서 남긴 업적을 비문이 전하여준다.

 

 

 

 

 

 

 

 

 

 

한국문학의 거장 이문열의 고향이며 그의 작품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 하리’ ‘영웅시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등 많은 작품 속 인물들의 삶의 역정이 펼쳐지는 무대이기도 하다. 생가 마당에는 200년 된 향나무 한 그루가 한 문인의 출세를 상징하듯 서 있다. 그 옆에 광산문학연구소가 있다. 광산문학연구소는 이문열이 문학도들이 문학창작과 연구 토론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2001년 5월 문을 열었다

 

비문을 뒤로 하고 대학교수이며 소설가인 이문열 작가의 생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 도착하여 보니 넓은 앞마당이 있고 뒤로 커다란 고택이 아무런 설명이나 안내도 같은 것이 없이 자리하고 있었다. 문화해설사 선생님의 말씀이 아니면 그곳이 이문열 작가의 생가인지 알 수가 없을 것이다.

 

이문열 작가 생가의 널찍한 앞마당에서 문화해설사 선생님을 중심으로 우리들은 둥그렇게 자리하고 선생님의 설명을 들었다. 이문열 작가의 생가에는 현재 사람이 살고 있지 않고 이 생가는 이문열 작가의 조부 때 가세가 기울어 조부께서 팔아서 현제는 다른 분이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문열 작가가 자신의 생가를 구입하여 문학연구소로 활용하고자 현제 소유하고 있는 소유주에게 팔 것을 요청하였으나 현 소유주는 팔지 않겠다고 했단다.

 

 

 

 

 

 

 

 

이문열 생가를 나와 옆에 자리한 광산문학연구소에 들러보고 것으로 두들마을 탐방을 모두 마치고 우리들은 버스가 주차되어있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버스에 오르기 전에 문화해설사 선생님과 잠시 이야기를 하였다. 선생님께서는 시간 관계상 여러 곳을 둘러보지 못하였다고 하시면서 언제고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 가족이 함께 와서 둘러보면 더 좋을 것이라고 말씀을 끝으로 모든 두둘마을에 대한 설명을 마치셨다. 우리 학생과 학부모들은 선생님의 자세한 설명에 대하여 고마운 마음을 담은 인사를 드리고 버스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