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에 대하여 생각하기

문화체험 - 가지 못한 조지훈 생가

心田農夫 2010. 12. 29. 12:34

 

학창시절 국어시간에 청록파시인에 대하여 공부를 하면서 아울러 조지훈의‘승무’를 배운 적이 있었지만, 내가 동탁 조지훈을 좋아하게 된 계기는 이십대 초반 한창 정신적인 방황을 하고 있을 때 조지훈을 만났다. 아니 정확이 말하자면 조지훈을 직접 만난 것이 아니라, 그 분을 글을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조지훈의 글을 읽으면서 방황을 멈추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당신들 세대만이 더 불행한 것은 아니다.’(1962년, 「사상계」) ‘어떤 길이 바른 길인가’(1963년 「사상계」)를 비롯하여 ‘지조론’(1960년 「새벽」) 등 이십 때 읽었던 글들은 패기는 있었지만, 이 길로 가야 하나 저 길로 가야하나, 하는 인생의 갈림길 앞에선 이십대의 젊은 나에게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달게 하여주었다.

 

“인연의 법칙에는 자의(自意)로서 선택이란 것이 없건만 사람만이 스스로의 길의 선택을 위하여 고민한다는 것은 자유의지(自由意志)의 재양이라고나 할 것인가, 하기는 짐승의 발자취를 따라 길이 열리고 생업(生業)의 터전을 향해 길이 열리던 원시시대의 길에는 선택의 고민이 없었다. 그러나 생활의 길이 관념의 길과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는 오늘의 이 가열(苛烈)한 노선경쟁(路線競爭)은 자연의 길이 아니요 인위(人爲)의 길이기 때문에,”

 

“성인을 자처하거든 남이 세워 주길 기다리지 말고 자신이 먼저 회의(懷疑) 하고 그 극복에 달라붙어야 한다. 배를 타고 바다 위에 떠돌고 있는 동안은 영원히 피안(彼岸)에 도달하지 못한다. 배를 버리고 언덕에 발부터 올려놓아야한다.”

                                   <어떤 길이 바른 길인가> 중에서

 

“싸움이라든가 술 마시는 일은 대학생이 아니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대학생의 싸움과 술은 다른 부류의 청년들과는 다른 그 무엇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참고 참다가 못 견디어 터지는 의분(義憤), 쌓고 쌓다가 울적(鬱寂)을 푸는 호연지기(浩然之氣)는 애초부터 인격적 수련(修練)을 바탕으로 하고 그와 병행해야 하는 것이다.

 

극언(極言)한다면 대학생의 싸움과 술은 그것도 하나의 공부여야 하는 것이다. 때와 곳과 사람을 가릴 줄 모르는 싸움과 주정은 낙제(落第)다. 20전후의 기운에 술 좀 과했다 해서 제 정신 못 차리는 자는 술을 마실 자격도 없는 자란 말이다.”

                             <청춘의 특권을 남용하지 말라> 중에서

 

이러한 조지훈의 글들은 좋은 스승으로 역할을 했고 나의 인생길의 이정표의 역할을 하여주었다. 특히 그의 글 중에서 지조론은 나를 매료 시켰다. 그 글을 이렇게 시작된다.

 

“지조(志操)란 것은 순일(純一)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確執),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 지조가 교양인의 위의(威儀)를 위하여 얼마나 값지고 그것이 국민의 교화에 미치는 힘이 얼마나 크며, 따라서 지조를 지키기 위한 괴로움이 얼마나 가혹한가를 헤아리는 사람들은 한 나라의 지도자를 평가하는 기준으로서 먼저 그 지조의 강도(强度)를 살피려 한다.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는 지도자는 따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일조(一朝)에 함정에 빠뜨리고 달아나는 지조 없는 지도자의 무절제와 배신 앞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망을 하였는가.”

                                                <지조론> 중에서

 

이글이 쓰인 시대의 정치상활이나 현재의 정치상황이나 변화가 있을 수 있겠으나 조지훈의 지조론을 보면 그 때나 지금이나 국민을 위해서 정치를 한다고 하지만 하나 같이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인들의 속성은 변하지 않은 것만 같다. 그래서 나는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 조지훈의 지조론을 한번쯤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 글이 쓰인 시절 권력과 부를 따라서 지조를 헌신짝 버리듯 버리고 변절하는 정치인 많았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자신의 이해타산 따져가며 이리저리 자리를 바꾸어가는 철새정치인이 있다는 것은 시대의 변화에 관계없이 변절은 그 글이 쓰였던 시절의 정치인이나 오늘의 정치인의 모습이 어쩌면 그리도 똑같은지 모르겠다.

 

정치인을 이렇게 보는 것은 나뿐만이 아닌가 보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법정스님께서도 1986년에 세상에 내놓으신 「물소리 바람소리」라는 자신의 책의 개정판을 2001년에 다시 출간하시면서 정치인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책이 나온 지 15년 사이에 세상은 이렇듯 크게 변했다.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고 있는 유일한 집단이 있다. 이 땅의 썩은 정치꾼들이다. 그들은 아직도 옹졸하고 배타적인 지역주위와 철가신 색깔론을 부추기면서 오로지 당리당략을 위해 선량한 국민들을 우롱하고 있다. 이 땅의 생태위기에 못지않게 유해한 독소들이다. 교정지를 보면서 세상이 바뀌어도 구태의연한 정치권의 한심스러운 작태에 대한 소감이다.

                                      「물소리 바람소리」중에서

 

조시훈선생이 보신 정치인이나, 법정스님의 눈에 비치인 정치인들이나, 세월의 간격이 있고 그 간격 속에서 세월은 멈추지 않고 흘렀건만 계절이 바뀌고 자연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고 사회가 바뀌고 세상이 바뀌었어도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정치인들뿐인가 보다. 그러나 그렇게 변하지 않는 정치인들이 자신의 이해타산에 따라 변절을 하는 것도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를 않는 것 같다. 조지훈 선생은 그들을 변절자로 부르셨고 지금은 우리들은 그들을 철새 정치인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 변절자에 대하여 조지훈 선생의 글을 보자.

 

“자기의 사상과 신념과 양심과 주체는 일찌감치 집어던지고 시세(時勢)에 따라 아무권력에나 바꾸어 붙어서 구복(口腹)의 걱정이나 덜고 명리(名利)의 세도에 참여하여 꺼덕대는 것이 자연한 일인지,”

 

“변절자에게는 저마다 그럴 듯한 구실이 있다. 첫째, 좀 크다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백이(伯夷), 숙제(叔齊)는 나도 될 수 있다. 나만 깨끗이 굶어 죽으면 민족은 어쩌느냐가 그것이다. 범의 굴에 들어가야 범을 잡는다는 투의 이론이요,

 

그 다음에 바깥에선 아무 일도 안 되니 들어가 싸운다는 것이요, 가장 하치가, 에라 권력에 붙어 이권이나 얻고 가족이나 고생시키지 말아야겠다는 것이다. 굶어죽기가 쉽다거나 들어가 싸운다거나 바람이 났거나 간에 그 구실을 뒷받침을 할 만한 일을 획책(劃策)도 한 번 못해 봤다면 그것 변절의 낙인밖에 얻은 것이 없는 것이다.”

                                                <지조론> 중에서

 

우리 속답에 “처녀가 애를 배도 이유가 있다.”는 말처럼 변절자들 변절을 할 때마다 이유가 있다고 그 변절의 이유를 구구절절 말하면서 자신의 변절에 대하여 합리화 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말한 이유에 대하여 시도조차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남는 것은 변절자란 낙인 밖에 얻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 변전이란 무엇인가? 동탁 조지훈은 지조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변절(變節)이란 무엇인가, 절개를 바꾸는 것, 곧 자기가 심신으로 이미 신념하고 표방했던 자리에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철이 들어서 세워놓은 주체의 자세를 뒤집는 것은 모두 다 넓은 의미의 변절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욕하는 변절은 개과천선(改過遷善)의 변절이 아니고, 좋고 바른데서 나쁜 방향으로 바꾸는 변절을 변절이라 한다.

                                                 <지조론> 중에서

 

조지훈은 말한다. 자신의 이기적인 심신을 위하여 좋고 바른데서 나쁜 방향으로 바꾸는 것을 변절이라고, 좋은 곳에서 나쁜 곳으로 방향을 바꾸면 신(身)은 편할지 몰라도 결코 조금의 양심이라도 있는 인간이라면 심(心)은 편치 않으리라.

 

나는 늘 살아가면서 이십대에 접했던 통탁 조지훈의 지조론을 마음에 담아두고 살아왔다. 살아오면서 어찌 변절의 유혹이 없었을까마는 조지훈의 지조론을 거울삼아 그 유혹을 뿌리치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러리라 생각을 한다. 그래서 이번의 문화체험에서 조지훈의 생가에 방문에 큰 의미를 부여하였던 것이나 그만 일정의 변경으로 가보지 못하고 말았다. 이번 탐방에 가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고 나중을 기약하며, 조지훈에 대해 스크랩했던 자료를 옮겨본다.

 

 

 

 

 

 

 

 

 

주실에 가면 ㆍㆍㆍ시심(詩心)이 넘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

조지훈의 고향 ‘영양 주실마을’

 

조지훈 시인의 ‘빛이 찾아가는 길’ 시비가 서있는 영양군 일월면 주실마을 숲이 생명의 숲과 산림청이 뽑은 ‘올해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으로 이름을 올렸다.

 

한양 조씨 집성촌이며 청록파 시인으로 우리나라 문단의 한 획을 그은 조지훈 생가가 있은 주실마을에 들어서려면 반드시 이 숲을 지나가야 하기 때문에 마을의 대문이자 마을을 감싸고 있는 울타리 역할을 하고 있다.

 

기존에 있던 천연림을 보완해 100년 전에 심은 소나무와 250년이 된 아름드리 느티나무, 느릅나무가 풍성한 숲을 이뤄 ‘시인의 숲’이라고 불리는 이 숲에는 시인을 기리는 기념시비가 서 있고 문학 해설이나 백일장도 열린다.

 

이 마을 주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종중이 영양군의 지원을 받아 숲을 자연 그대로 잘 가꿔가고 있다.

 

조지훈 시인의 고향이기도 한 이곳은 한양 조씨의 집성촌으로 흔히 이 마을을 ‘주실’이라 부른다. 이 집안은 본래 한양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나 같은 가문의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축출되자 한양을 떠나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가 1630년경 호은(壺隱) 조선이라는 사람이 가솔을 이끌고 이곳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꿀을 묻힌 잎사귀를 갉아 먹은 벌레가 만든 발자취, 주초위왕(走肖爲王)은 결국 이 마을에 주실 숲을 만들게 한 것일까?

 

숲에는 느티나무, 참느릅나무, 검팽나무, 팽나무, 산팽아무, 시무나무, 버드나무가 군락을 이뤄 자리고 있고, 숲 가운데로 지나가는 지방도로 이 숲에는 나그네가 쉬어가도록 의자도 설치돼 있다.

 

예부터 주실 마을 사람들은 입신양명에는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력했다고 한다. 교육열이 남달리 강했고, 아무리 힘들지라도 재산, 사람, 문장은 빌리지 않는다는 삼불차(三不借)가 이 마을의 면면한 모습을 지켜가고 있다.

 

마을에서 보면 앞의 문필봉은 그윽한 먹 향기를 품고 있고, 왼편의 주실 숲은 일월산 자락과 도드라지지 않게 이어져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하고 있다. 주실 마을에는 옥천종택, 조지훈 시인의 족가인 호은 종택, 옛 서당인 월록서당 등 고택이 있고, 작지만 아담한 앞뜰과 실개천이 마을 앞으로 흘러 주실 숲으로 향한다.

 

북받치는 설음을 하소연 할 길 없었을 때 찾았던 마을에, 한양 조씨가 터를 잡고 좌청룡이 악한 지세를 보(補)하고자 밭을 사들여 나무를 심고 숲을 보전해왔다는 촌로(村老)의 말은 부질없는 세상에 자신을 붙잡고 싶거든 여기로 와보라는 수의 고요한 속삭임으로 들릴 뿐이었다.

 

또한 이곳은 시인 조지훈의 숨결이 살아 있은 곳이다. 그 숨결을 고스란히 담아놓은 ‘지훈문학관’은 청록파시인 이었던 조지훈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조지훈 문학은 자연과 함께 한다. 자아와 자연의 동질성에서 그의 시 세계를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시에서 자연이란 좁게는 대상적 자연을 말하지만 넓게는 그가 체험한 삶의 전체를 포괄하고 있다. 이는 곧 자신의 고향인 아름다운 영양군의 모습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이다.

 

해마다 5월이면 이곳에서는 지훈 예술제도 열린다. 백일장과 사생대회는 물론 문학과 국학강좌, 청소년음악제 등 다양한 행사를 통해 조지훈 문학을 살펴볼 수 있다.

 

주실 마을에는 지훈 문학관을 비롯해 조지훈의 생가, 옥천종택, 월록서당 등을 함께 볼 수 있다. 또 시인의 숲, 지훈 시공원, 문필봉 등을 찾으면 시안의 향기를 맡을 수 있을 것이다.

 

                           <경북일보, 2008년 10월 31일> 에서 인용

 

한해가 저무는 요즈음 걸어왔던 한해의 뒷자락을 돌아보면서 올바른 길을 제대로 걸어왔나 돌아보게 된다. 흐르는 물처럼 멈춤 없이 흐르는 시간 한번 밖에는 함께 할 수없는 시간들, 그 시간들과 나의 인생길을 제대로 걸어온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