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에 대하여 생각하기

시도 좀 읽읍시다 - 1

心田農夫 2011. 4. 23. 13:38

 

 

위의 제목은 법정스님의 「산방한담」안에 있는 소제목이다. 스님이 순천장에 갔다가 돌아오는 차안에서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시집을 펴들고 열심히 읽는 걸 보고 쓰신 글이다. 스님은 그 학생이 시를 보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으셨단다.

 

 

스님이 감명을 받으신 것은 입시지옥의 문 앞에 들어선 고3 학생이 시험공부와는 직접 상관이 없는 시를 읽는 것을 보고 대견하고 믿음직스러웠다고 말씀하신다.

 

 

스님이 이글을 쓰신 것이 1993년이니 지금으로부터 18년 전이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강산이 한번 변하고 두 번째로 변화를 시도 하고 있을 법한데도 우리의 교육의 현실은 조금도 변하지를 않고 있다. 우리의 학생들은 교과서와 참고서외에는 볼 시간이 별로 없다. 글 속에 나오는 학생처럼 스스로 독서를 할 시간도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이 우리나라 대다수의 학생들이다.

 

 

그러다 보니 학교에서 강제로 독서를 하게 한다. 몇 권의 책을 선정해 놓고 읽고 독후감이라는 것을 써서 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독후감에 점수를 매겨 성적에 반영한다. 독서라는 것이 자신의 취향에 따라서 읽고 싶은 책을 스스로 선택을 해서 읽어야지 일률적으로 같은 책을 읽으라는 것은 학생들의 독서에 대한 반감을 갖게 되고 독서를 권장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책과 멀어지게 하는 것은 아닐는지

 

 

시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시인의 관조(觀照)가 독자적인 리듬을 통해 우리 마음에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 리듬은 물론 정제된 언어의 구성으로 울려온다. 그리고 그 낱말의 언어는 시인에 의해 선택되고 창조된 것들이다.

                                 법정스님의 「산방한담」중에서

 

 

창조는 모방에서 온다고 하였던가? 세계10대 경제국이라는 대한민국그 대한민국에 아직 노벨문학상을 받은 사람이 없다, 고은시인이 두어 번 후보에 오른 것이 전부이다. 그래서 지금도 추지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언제인가 한 일류대학교에서“노벨상 프로트”라는 것을 만들었다는 뉴스를 들은 적이 있다. 노벨상을 타기위해 대학과 정부가 발을 벗고 나선 것인데 꼭 그렇게 해서 노벨상을 탈수 있을는지 의구심이 든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니고 우리 고유의 말과 글을 쓰고 있으면서 세계의 언어 시장에 민족의 서사시 한 편 내놓을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은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우리가 만든 상품과 노동력은 세계 시장을 넘나들면서도 정신문화의 소산인 언어예술은 이렇다 할 진출이 없다는 말이다.

                                 법정스님의 「산방한담」중에서]

 

 

 

아침 7시 30분에 집을 나서 학교에 가 저녁 10시 30분에 집에 돌아오는 우리나라의 고등학교의 학교생활 거기다 어느 학교는 밤 12까지 학교에서 있어야 한단다. 그런데 밤10시까지 학교에 학생이 있어야 하는 학교도 10시 넘어서 학교교문을 나서서 다시 학원이다 과외다 하여 공부를 하러가는 현실에서 시를 읽거나 좋은 책을 접할 시간이 없는 것이다. 오직 학교의 존재이유는 학생을 대학에 입학시키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 같다.

 

 

학교라면 학생들에게 지식을 배워주고 따라서 품성을 키우는 인성교육이 있어야 하는데 요즘에 학교교육에서 인성교육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자라는 학생들에게 자신의 조국의 역사, 한국사를 가르치는 시간도 차자 줄이고 있는 실정이고 도덕시간, 윤리시간이 국어ㆍ 영어ㆍ수학 등의 과목으로 대체 대는 현실에서 시를 읽고 책을 볼 시간이 없는 것이다.

 

 

시를 읽으면 품성이 맑아지고 언어가 세련되며 물정(物情)에 통달되니 수양과 사교 및 정치 생활에 도움이 된다. 시를 읽지 않은 사람은 마치 바람벽을 대한 것 같다.

                                 법정스님의 「산방한담」중에서

 

 

어떠한 교육보다도 시를 비롯하여 좋은 책은 읽은 것이 자라는 학생들에게는 필요하지 않을까? 법정스님은 시를 읽으면 품성이 맑아지고 언어가 세련되고 물정에 밝아지니 수양이 되고 사회생활을 할 때 사교와 정치 생활에 도움이 된다고 말씀한다. 즉 좋은 시와 좋은 책을 읽으면서 자연이 품성이 갖추어지고 사회생활에 필요한 인성교육이 된다는 말일 것이다.

 

 

한 편의 좋은 시는 우리들 마음에 낀 녹을 닦아내고 맑은 눈을 열게 한다. 베토벤의 말처럼 훌륭한 시는 가장 아름다운 그 나라의 보석이 될 수 있다. 우리 모국어의 아름다운과 그 잠재력을 시로써 드러내고, 또한 그걸 읽음으로써 삭막한 세태에서 오염된 우리들의 혼을 맑힐 수 있을 것이다.

                                  법정스님의 「산방한담」중에서

 

 

신체발부 수지부모니 불감훼상이 효지시야(身體髮膚 受之父母니 不敢毁傷이 孝之始也) 라는 옛말도 있는데, 부모님이 목숨 걸고 낳아주신 생명을 성적 때문에 스스로 놓아버리게 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교육의 모습이다. 교육이란 스스로 하는 것이지 강제적으로 주입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타고난 재질이 있는데 어떻게 전부를 다 잘할 수 있는가 거기다 우리의 교육 하면서 그렇게 꼭 영어로 가르쳐야 교육을 개혁하는 것인가

 

 

묻고 싶다. 교육의 정책을 입안하는 높은 분들에게, 왜 교육을 하는가? 왜 교육정책 입안자들은 시도 때도 없이 교육정책을 그렇게 잘 바꾸는지? 묻고 싶다. 그 답을 듣고 싶다. 그러나 물어도 물어도 허공의 메아리만 울릴 뿐 정책입안자들은 답변은 들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선조인 다산은 그 답을 말해준다. 왜 교육을 하는가? 에 대하여 다산 정약용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기본 도리를 벗어난 공부는 이 세상에 없다. 공부는 왜 하는 가?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한다. 무엇이 사람다운 것인가? 인간의 기본 도리에 충실한 것이 사람다운 것이다.

                        정민의 「다산선생 지식 경영법」중에서

 

 

다산은 이렇게 공부하지 않는 것은 자기를 속이고 남을 기만하는 것이란다. 우리의 교육정책자들은 우리의 순진한 학생들 스스로 자신을 속이게 하고 남을 기만하는 공부를 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정책을 입안하면서 다산의 이 말을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매번 앵무새처럼 교육은 백년지 대계라고 읊조릴 것이 아니다. 말로는 교육은 백녀지 대계라 그러면서도 백년은 고사하고 십년도 안 되어 교육정책을 바뀌고 바뀐다. 그들이 말하는 백년과 내가 알고 있는 백년은 같은 백년이 아닌가 보다.

 

 

이글을 쓰고 있는 시간에 교육정책입안자들은 그 백년지 대계라는 교육, 그 교육정책을 다시 바꾸었단다. 즉 선택으로 가르치던 한국사를 필수과목으로 반드시 배워야 하는 과목으로 바꾸었다는 소리가 라디오라는 소리통을 통하여 들려온다. 아마 내년 이맘 때 쯤 똑똑하신 교육정책입안자들 대학입시에서도 한국사는 선택이 아닌 필수로 바꾸겠다고 말하겠지

 

 

그 소식을 들으니 괜히 점잖은 입에서 욕을 하고 싶어진다. 참다 허공에 대고 한마디 한다. 야! 생각 없고 무책임한 놈들아 라고, 지금 사무실 창밖으로 봄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비가 오니 손님도 없고 스님의 말씀이 “시도

좀 읽읍시다” 하셨으니, 시나 읽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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