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글 긴 여운

살기위한 교육이 가져온 죽음을 보며

心田農夫 2011. 4. 11. 16:05

우선 이글을 시작하기 전에 꽃도 펴보기 전에 스스로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떠난 학생들에게 저 세상에서는 행복하였으면 하는 마음으로 고인의 명복을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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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ST 학생이 올 들어 네 명이나 스스로 생을 반납했다. 무한경쟁의 삶을 살아야하는 오늘날의 현실에서 뒤 처진 성적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성적만능인 우리의 교육이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 생각을 해본다.

 

“그래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좋다”라고 하는 말도 있는데, 전도유망한 젊은 그들이 이승이 싫다고 저승을 택해 이승을 떠났다. 그들을 그렇게 죽음으로 내몰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데 학생들의 자살에 이어 세계적 생명공학자의 한사람인 KAIST 교수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단다. 물론 학생들의 자살과 관련이 없고 연구비에 관한 일이라고 한다.

 

 

이렇게 학생들의 연이은 자살의 이유가 KAIST의 서총장이란 분이 만든 징벌적 등록금제인‘차등수업료제’에 대해 심한 압박감과 자괴감을 이기지 못해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차등수업료제’라는 제도는 MIT에서 학장을 지닌 서총장이 부임하면서 미국식 글로벌 마인드의 일환이었단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말도 있듯이, 선진국의 좋은 제도를 받아드리는 것이야 그 누가 무엇이라 하겠는가. 그러나 이런 말도 있다. 민주주의란 제도가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우리 풍토와 우리 백성들에게 맞아야 한다고 즉 민주주의라는 제도가 아무리 좋은 제도라 하드래도 우리에게 맞게 고쳐서 우리의 민주주의로 자리 잡고 꽃을 피워야 한다는 말이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외국에서 공부하고 배웠다고 우리의 정서를 무시하면서 꼭 그대로 따라서 해야 할까. 그 제도를 보안하고 고쳐서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 적용을 했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그 서총장이라는 분 네 명의 제자가 자살을 하였는데도“명문대 생은 압박감을 이겨야 한다. 는 메시지를 보내면서 “무엇도 공짜로 얻을 수는 없다”그리고 11일 한 언론매체는 카이스트 교과 개혁을 주장하며 1인 시위를 하고 있던 1학년학생 이모군과 5일 면담에서 서총장이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한다. “미국의 명문대는 자살률이 더 높다”라고 말했단다. 명문대에서 자살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라는 말인지,

 

그래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말에 동감한다. 그런데 그 공짜로 줄 수 없다는 것이 일정한 성적이 안 될 때는 가르침에 공짜가 없다는 것이고 일정한 성적이 될 때는 가르침을 공짜라는 이야기인데, 그것은 어찌되었건 공짜가 아닌가?

 

 

그러한 논리가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말과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도 않는다는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오늘 날에 사라지는 이유인 것이다. 내가 내 돈 내고 지식(가르침)을 사는데 지식을 파는 장사꾼한데 존경은 무슨 왜 존경이 필요한가 말이다. 스승이 아닌 지식을 파는 장사꾼이기를 스스로 원하는데 배우는 학생이라고 일방적으로 존경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이세상의 이치가 오는 것이 있어야 가는 것이 있는 법이 아니던가.

 

 

교육을 한다는 이들이 진정 교육이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을까? 1577년 선조 10년에 율곡선생이「격몽요결(擊蒙要訣)」이란 책에 쓰셨다. ‘격몽(擊蒙)’이란 몽매한 자들을 교육한다는 의미이고 ‘요결(要訣)은 그 일의 중요한 비결이란 뜻으로, 즉 교육을 하는 중요한 비결을 말함이다. 율곡선생이 그 책의 집필 동기를 서문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내가 바다 남쪽에 집을 정하고 살려고 하니 학도 한두 사람이 와서 나에게 배우기를 청하였다. 이에 나는 그들의 스승이 되지 못할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한편, 또 처음 배우는 사람들이 아무런 향방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더욱 확고한 뜻이 없이 그저 아무렇게나 이것저것 묻고 보면 서로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도리어 남들의 조롱만 받을까 두렵게 생각되었다.

 

 

이에 간략히 책을 한 권을 써서 여기에 지가 마음을 세우는 것, 몸소 실천할 일, 부모 섬기는 법, 남을 대하는 방법 등을 대략 적고 이것을 「격몽요결(擊蒙要訣)」이라고 이름 했다. 학도들에게는 이것을 보여 마음을 씻고 뜻을 세워 마땅히 날로 공부하도록 하고자 하며, 또 나 역시 오랫동안 우물쭈물하던 병을 스스로 경계하고 반성하고자 한다.

                                율곡 이이 「격몽요결」중에서

 

 

정승이요 대학자이었던 율곡선생께서 자신에게 배우로 오겠다는 사람들의 스승의 되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겼다하고 자신의 우유부단한 병을 스스로 경계한다고 말씀하신다. 남을 가르친다는 것이 어이 쉬운 일이겠는가. 수신제가(修身齊家)라 하지 않았던가. 자신의 집안을 다스리는데도 스스로 자신을 닦아야 한다고 하는데 하물며 남에게 지식을 전달하려면 어찌 자신부터 갈고 닦아하지 않으리오.

 

 

대 정승이요 대학자도 이러할 진데 고작 미국에서 공부좀했다고 그저 미국의 제도는 다 옳다는 사고방식으로 다른 의견과 어떠한 이견(異見)이나 조언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총장이라고 권위로 일관을 했다고 한다. 진정 서총장이 교육자라면 학생들의 의견이나 다른 교수들의 이견(異見)이나 조언에도 귀를 기울였어야 한다.

 

 

어떤 체제나 편견에 의해 구속되지 않는 기민하고 유연한 정신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기술과 강한 열의, 무엇보다도 애착이 요구된다. 이와 같은 자질을 갖춘 교육자들을 배양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주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크리슈나무르티의 「교육과 인생의 의미」중에서

 

 

 

위의 글은 크리슈나무르티의 말이다. 체제나 편견에 구속 되지 않아야 하고 애착이 있어야 한다고 말을 한다. 자신이 아무리 옳다고 해도 다른 의견에도, 이견이나 조언에 대하여서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총장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군주와 같은 태도로 마치 제왕인양 독단으로 KAIST을 이끌어 왔다는 것이 지금 여러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들어나고 있다. 진정한 선생의 자질은 이러한 것이 아닐까.

 

 

학교는 교장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한 사람에 의한 열성은 시들게 마련이다. 그와 같은 열성은 다른 사람의 변덕이나 공상에 좌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시적이고 가벼우며 그다지 가치가 없다.

 

만일 교장이 지배적이면 자유와 협동의 정신은 분명히 존재할 수 없다. 강력한 인물은 일류학교를 만들 수 있을지 몰라도 공포와 비굴함이 스며들어 일반적으로 여타직원들이 무의미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어떤 개인의 자유와 지성을 존중하는 정신이 언제나 학교전체에 퍼져 있어야 한다. 이는 우연에 맡길 수는 없으며 “자유”와 “지성”이라는 말을 우연한 기회에 잠간씩 언급하는 것으로는 거의 의미가 없다.

 

 

잡단 전체의 복지에 관련된 모든 문제를 사제 간이 정기적으로 모여서 논의하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교사가 참석하는 학생회를 구성하여 훈육ㆍ청결ㆍ점심 등에 관한 모든 문제를 논의할 수 있고, 약간 방조하거나 무관심하거나 반향적인 학생들을 지도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학생들은 결정사항을 실천하고 전반적인 감독활동을 협조할 수 있는 사람들을 자체적으로 선출해야 한다. 결국 학교의 자치 기구는 나중에 자치정부를 운영하기 위한 기초가 된다.

                  크리슈나무르티의 「교육과 인생의 의미」중에서

 

 

학교라는 곳은 지식을 배우는 곳이기도 하지만 사회에 진출하기 전에 작은 사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작은 사회를 배우고 익힘으로 사회를 경험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아직은 덜 성숙한 학생들에게 부족한 부분을 지도하고 가르치는 곳이 학교라는 울타리 안의 작은 사회가 아닐까? 그래서 이 작은 사회 안에서는 올바른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크리슈나무르티가 말하는 올바른 교육에 대하여 들어보자.

 

 

 

교육은 단지 지식을 습득하고 정보를 수집하여 연관 짓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인생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다.

 

교육의 기능은 통합된 지성적인 인간을 육성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성적이지 않더라도 학위를 얻을 수 있고 기계적으로 능률을 발휘할 수 있다.

 

 

지성의 본질적인 것, 현실을 지각하는 능력이며, 자신과 타인에게서 이러한 능력을 깨우치는 것이 교육이다.

 

교육은 우리로 하여금 영속덕인 기치를 발견하여 단지 공식에 매달리거나 어떤 문구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크리슈나무르티의 「교육과 인생의 의미」중에서

 

 

크리슈나무르티는 이렇게 교육에 대하여 말하면서 올바른 교육에 대하여 서도 이렇게 말한다.

 

 

올바른 교육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전반적인 인생의 의미를 분명히 이해해야 한며, 일관된 방식에 의해서가 아니고 직접적이고 진실 되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일관된 사고는 어떤 유형에 따르는 것이며 반복적이고 판에 박힌 생각이기 때문에 깊이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존재의 의미를 추상적 또는 이론적으로는 이해 할 수가 없다. 인생을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며, 그것이 교육의 시작이요 끝이다.      

                 크리슈나무르티의 「교육과 인생의 의미」중에서

 

이번의 KAIST학생들의 잇단 자살을 계기로 우리들의 교육에 대하여 생각하여야 할 것 같아 이글을 적어본다. 교육 그것이 왜 필요한 것이고 어떠한 교육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이시대의 많은 지식인과 학부모들이 한 번은 진지하게 생각하여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하면서 교육의 아버지라 불리는 페스탈로치의 말을 다시 상기해 본다.

 

인간은 마음속에 평안을 누리도록 교육받아야 한다. 자신의 처지와 자기 손으로 얻을 수 있는 복으로 만족하는 것 어떠한 어려운 고비에서도 참고 견디며 어버이의 사랑을 흠모하고 믿는 것, 이러한 일들이 인간을 지혜로 이끄는 교육이다

                           페스탈로치의 「은자의 황혼」중에서

 

                          

 

일등만을 바라는 교육. 일류대, 명문대를 가기위한 교육, 그리고 그 일류대 명문대를 또 나와야 하는 교육. 그래서 일등만이, 일류대, 명문대 출신만이, 대기업 입사해야 만이 인간이고 존재 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교육. 일등이 아닌 이등이요 삼등인 젊은이들이 성적으로 인해 죽음으로 내모는 교육, 이러한 교육이 언제까지 이렇게 흘러가도록 방치해야 하는 걸까?

 

 

페스탈로치의 교육이념처럼 선악과 발전가능ㆍ평등성을 대전제로 하는 사랑의 교육. 성적은 조금 못하더라도 자신의 뜻을 세우고 몸을 삼가며 부모를 모시고 남을 대하는 방법을 가르치는데 교육의 목적이 있다는 율곡이이의 교육론. 교육의 목적은 개인 상호간 및 개인과 사회 간의 올바른 관계를 촉진시키는 것이고 그러므로 교육에서는 무엇보다도 개인이 자신의 심리적 과정을 이해하도록 촉구해야 한다고 크리슈나무르티는 교육의 목적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교육이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하다 느껴지는 오늘하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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