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에 대하여 생각하기

스승 같은 벗, 벗 같은 스승

心田農夫 2011. 4. 28. 12:54

 

 

 

방금 읽기를 마친 책속에 “스승 같은 벗, 벗 같은 스승”이란 글이 있었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사고를 가진 우리들에게 스승이 벗이요, 벗이 스승이라는 말은 쉬 납득이 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의 인식에는 스승은 스승이지 벗이 될 수 없고 벗을 스승으로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책을 덮고서 유리창에 부딪쳐 흘러내리는 빗줄기를 한참이나 묵묵히 바라보면서 생각을 해 본다. 나의 인생에서 스승 같은 벗 , 벗과 같은 스승이 있었나를, 중년의 나이에 이르기 까지 여러 선생님을 만났을 것인데, 유독 선명히 생각나는 사람은 단 두 분이다. 그런데 그 두 분의 스승이 스승 같은 벗이었고 벗과 같은 스승 이였나 하는 생각도 해본다.

 

 

중년이 되기까지 살아오면서 나에게 가르침을 주셨던 선생님들의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지나간 세월 속에 기억되는 선생님들, 아련히 선생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허나 지난 세월이 길어서인지 선생님의 존함이 생각나는 분도 있지만, 어느 선생님은 그 당시의 일들만 어렴풋이 기억된다.

 

방금 읽은 책「조선 지식인의 서가를 탐하다」에스승 같은 벗, 벗 같은 스승”이라고 스승의 범주를 생각했던 분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말하는 스승과 친구란 원래가 하나이다. 어떻게 두 가지 다른 의미가 존재 하겠습니다까?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친구가 바로 스승인줄 을 알지 못하니, 이리하여 내번 절한 뒤에 수업을 전해 듣는 사람만을 스승이라 이야기하지요. 또 스승이 바로 친구인 줄은 모르고 그저 친교를 맺으며 가까이 지내는 자만을 친구라고 일컫습니다. 친구라지만 사배(四拜)하고 수업을 맡을 수 없다면 그런 자와는 절대로 친구하면 안 되고, 스승이라지만 마음속의 비밀을 털어놓을 수 없다면 그를 스승으로 섬겨서도 안 됩니다. 고인은 친구가 연계하는 바의 중요성을 아셨기 때문에 특별히 ‘스승 사(師)’를 ‘벗 우(友)’ 앞에 놓으시어 친구라면 스승이 아닐 수 없음을 보이셨으니, 만약에 스승이 될 수 없다면 친구도 될 수없는 것입니다.

 김풍기의 「조선 지식인의 서가를 탐하다」에서 인용

 

 

위의 글은 명나라의 이지(李贄) 라는 분의 글이라고 합니다. 그의 호가 탁오(卓吾)이므로, 흔히 ‘이탁오’라 불린다고 합니다.

 

우리의 인생길 걸어가노라면 우여곡절(迂餘曲折)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때마다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서 올바른 길을 갈 수 있고 때로는 좋은 벗이 함께 하므로 어려움을 헤쳐 나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승과 벗을 나누어 생각합니다만, ‘이탁오’라는 분의 글을 읽으면서 “스승 같은 벗, 벗 같은 스승”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배우는 제자나 가르치는 스승이나 그런 만남은 인격적이지 않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스승의 체벌이 논란이 되는 세상, 학생인격을 이야기하면서 선생님의 인격은 말이 없는 우리사회. 얼마 전 경기도와 서울시에서 체벌을 금지 한 후의 선생님들이 문제아를 대하는 태도에 대한 견해에서 많은 선생님들이 방임적인 자세로 일임한다는 소리를 듣고는 우려하는 일이 실지로 일어나고 있음에 마음이 아파 습니다.

 

처벌문제가 사회에 이야기 될 때마다 폭력이 아닌 체벌이 방임보다 옳다고 생각을 해왔습니다. 저렇게 학생들의 인격만을 이야기하고 무조건 체벌은 안 된다고 말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저러면 선생님들이 방임을 하면 어떻게 될까 생각을 했기에 이번의 조사는 나의 염려가 현실로 들어나서 나를 우울하게 합니다.

 

왜 우리사회는 체벌보다 더 무서운 방임에 대하여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고, 폭력과 체벌에 대하여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언젠가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던 ‘오장풍’교사의 동영상을 보고 그것은 폭력이지 체벌이 아니라고 생각을 했고 그 사람은 교사라고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 학창시절에는 대다수의 스승을 부보님이나 다름없이 생각을 해왔지요. 그래서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 해서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의 은혜는 같다고 했습니다. 그런 스승님들이 이제는 사명감은 없어지고 하나의 직업인으로 전락한 것 대해서 오늘의 선생님들이 돌아보아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전 세계의 영적 스승이라 말하는 달라이 라마는 스승에 대하여 우리에게 이런 말을 말합니다.

 

마음공부의 여정에서 맺게 되는 인연 중에 , 무엇보다 훌륭한 영적 스승을 모시는 게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한테서 배우냐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까 모르겠네요.

 

여러분이 스승으로 모시고자 하는 이가 있거든, 그가 불자이든 다른 신앙을 지닌 사람이든, 시간을 가지고 자세히 지켜보시기를 바랍니다.

 다라이 라마「마음 공부」중에서

 

달라이 라마는 어떠한 분을 스승으로 모시느냐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스승을 모시려면 시간을 가지고 자세히 지켜보라고 지혜를 줍니다. 그리고 스승의 자격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이 제대로 자격을 갖추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그가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객관적으로 알아보아야 하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과연 자기가 가르치는 대로 살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그가 우리 길을 인도할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달라이 라마「마음 공부」중에서

 

달라이 라마는 스승의 자격에 대하여 자기가 가르치는 대로 살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 합니다. 이 말을 언행일치(言行一致)를 말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언행일치를 하는 사람이 선생의 자격이 있다. 잘은 모르지만 진실만을 말하며 살았던 사람, 그래서 목숨까지 버려야 했던 사람, 그리고 이탁오가 말하는“스승 같은 벗, 벗 같은 스승” 그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사실상 나는 한 번도 누군가의 스승이 되어본 적이 없지만, 나이가 적건 많건 내가 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할 경우에는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돈을 받아야 대화를 하고, 받지 않으면 대화를 하지 않는 적도 없으며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등이 없이 대했습니다. 나의 말을 듣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말입니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중에서

 

위의 글은 멜레토스와 아니토스가 청년들을 타락시키고, 나라가 인정하는 신들을 부정하였을 뿐 아니라. 다른 신을 섬기기 때문에 죄인라고 고발하여 법정에 세웠을 그때,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아테네 시민들에게 스스로 자신을 변론 한 변론 중의 일부이다.

 

소크라테스는 나이가 많던 적던 재산이 많던 재산이 없는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자신에게 지혜를 구하는 사람에게 언제나 스스럼없이 그들과 대화를 하면서 자신의 지혜를 전해주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도 말합니다. 여러분 개개인을 내가 생각하는 입장에 따라 최대한 훌륭하고 지혜롭게 만들고자 해 습니다”아울러 그는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여러분을 실제로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처럼 돈도 받지 않고 그는 가르침을 준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을 “신으로부터 명령받은 일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사명의식을 말하는 것이리라 사려됩니다. 가르치는 일은 이처럼 사명의식이 있어야 하고 배우는 자는 배워서 지혜로워져야하고 그래서 행복해야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오늘날 선생님들이 이 소크라테스의 말을 한번쯤 되새겨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입니다. 아주아주 오래전, 기원전에 살았던 대철학자, 소크라테스, 그가 진정으로“스승 같은 벗, 벗 같은 스승”이 아니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