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뜸가는 포기와 희생은 자만심을 겸허한 마음으로 대치하는 것이다. 이를 실천하려면 그저 자기 의견을 내세우거나 남을 판단하려는 교만한 태도를 버리기만 하면 된다.
온갖 입장을 버릴 때 지각의 이완성에서 비롯된 ‘양극의 오류’의 한계에서 벗어나게 된다. 무슨 생각을 하든 으레‘나’라는 용어를 앞세워 생각하곤 하는 습관을 버릴 때 에고의 나르시스적인 핵심에 대한 집착은 줄어든다.
생각을 표현할 때 ‘나’라는 일인칭 주어 대신 삼인칭 주어를 사용하는 습관을 가져보라.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때 비인격적인 전술 방법을 사용할 경우 쟁점들 속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을 막아준다.
데이비드 호킨스의 「나의 눈」중에서
요즈음 국회의원 하겠다는 사람이 참으로도 많다. 예비후보라는 사람들 하루에도 몇 차례씩 들려서 예비후보라고 적힌 명함을 전해 주면서 얼굴은 바닥으로 향하여 허리는 구십 도로 꺾어서 깍듯이 “잘 부탁드립니다. “ 라고 인사를 하고는 한다.
내가 몸담고 사는 곳이 경상북도 이다 보니 한나라당, 아니 새 누리당의 공천을 받겠다고 예비후보로 나선 사람들이 일곱 명이라던가? 아무튼 우후죽순(雨後竹筍) 솟아나오듯 예비후보들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여기서 저기서 명함을 불쑥 불쑥 들어 밀고는 하더니, 어제 공천이 확정 되었나보다.
정확한 뜻은 잘 모르겠다마는 “누리”라는 말은 ‘세상’이란 의미(意味)의 말이고 “새” 라는 말은 ‘새로운’ 이란 뜻일 것이고, 그렇다면 “새 누리” 란 “새로운 세상”이라는 의미(意味)인 것 갖은데,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보겠다는 새 누리 당에서 이번에 이곳에 공천을 한 사람은 새로운 인물이 아니었다.
이곳에 새로운 사람이 공천을 받든 예전의 사람이 공천을 받든 별 상관이 있는 것은 아닌데, 그 새 누리당의 공천이 확정되고 나니 설왕설래(說往說來) 말도 많고 탈도 많다. 가만히 듣고 보고 있자니 영 보기에 좋지를 않다는 말이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고 “한나라당”에서 “새 누리당”으로 당명을 바꾸었을 텐데 하는 짓거리들을 보면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 보다는 “새롭게 다시 누리어 보자” 라는 뜻이 아니었나 하는 의구심이 든다.
왜 사람들은 떠나야 할 때를 모르고, 왜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일까? 공천을 신청했으면 공천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일을 일임하겠다는 뜻이었을 것인데, 공천이 끝나고 나니 승복을 못하겠다. 점수를 밝혀라. 등등 말도 많다.
아침에 출근하여 커피 한잔 타 마시며 책을 읽다 위의 글을 보면서 어제 퇴근길에 차안에서 공천 후에 관한 것을 주제로 하는 토론을 들었던 것이 생각이나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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