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살아가는이야기

또 하나의 의문을 마음에 담는다.

心田農夫 2013. 2. 8. 13:00

 

한권의 책을 읽다가 새삼 떠오른 일이 있다. 벌써 몇 년이 지난 일이지만,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게 기억이 되는 일이다. 그 일이란 ‘용산참사’라고 불리는 일이다.

 

우리 사회는 언제나 두 가지 의견으로 나뉘는 것을 볼 수 있다. 용산 참사 사건만 해도 테러분자들에게나 할 수 있는 과잉진압으로 인해 불쌍한 철거민들과 경찰 양쪽에 사상자가 생긴 것은 공권력의 잘못된 행사였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고, 철거민들이 권리금을 터무니없이 뻥튀기해서 한몫 잡겠다고 한 철거민들이 잘못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했나. 그것에 대하여 말할 입장도, 또 말하고 싶지도 않다. 내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책 내용에 있는 것처럼 가난한 자들도 거주에 대한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왜? 우리는 어제나 개발이란 이름으로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자들을 몰아 내야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 뿐이다.

 

 

 

 

 

“아바랄리 바세음존돌로가 하고 있는 일은 부유하든 가나하든, 교육을 받았든 받지 못했든 간에 열린 ‘생활 정치’를 탄생시키는 것이다. 스부 지코데는 아래와 같은 감동적인 말로 생활 정치를 규정하고 있다.”

 

생활 정치는 공식적인 교육이 필요하지 않다. 매일의 일상과 그 속에서 발생하는 문제에서 생겨나는 것이라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활 정치는 모든 보통의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정치다.

 

그것은 우리에게 물이 없지만, 모두 물을 얻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아는 정치다. 또한 전기가 우리 생활에 필요하므로 모두가 전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정치다.

 

지금은 화장실이 없지만 화장실이 필요하다는 것, 바로 그러한 이해 방식이 생활 정치다. 복잡하지 않다. 정보를 찾기 위해 두꺼운 책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숨은 의제도 없다. 그것은 오로지 생활의 본성에 기반을 둔 생활의 정치다. 모든 사람이 이러한 종류의 요구를 이해할 수 있고, 이러한 요구가 정당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들은 자신이 도시의 사회와 경제에 ‘이미’완전한 일부가 되었으므로, 마찬가지로 도시의 정치에도 포합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모든 도시의 가난한 거주자가 가장 먼저 가져야 할 도시에 대한 실질적 권리는 쫓겨나지 않을 권리다. 특히 퇴거와 압류가 기록적으로 높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는 지금, 이 문제는 많은 도시 극빈 거주자에게 첨예한 사안이다.

                                     라즈 파텔의 『경제학의 배신』중에서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읽으며 느껴 던 마음이 이 책의 위 부분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왜 우리의 위정자들은 진정으로 그들을 필요한 곳에는 없고 그들이 없어도 잘 살 수 있는 곳에만 머물려고 하는 것일까?

 

한 표 한 표를 달라고 할 때는 정말로 밑바닥 인생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너무도 잘도 찾아다니면서, 정작 그 한 표 한 표가 모아져 당선이란 두 글자를 가슴에 안고나면 언제나 그들은 밑바닥 인생들은 외면하지 않았던가?

 

나는 수도 없이 보아왔다. “모든 도시의 가난한 거주자가 가장 먼저 가져야 할 도시에 대한 실질적 권리는 쫓겨나지 않을 권리다.” 쫓겨나지 않을 권리, 그 권리를 무시한 채, 공권력이란 이름으로 그 권리를 빼앗아 왔다.

 

봉천동, 사당동, 난곡의 산동네에서 판잣집을 짓고 살던 가난한자들은 개발이란 이름아래 도시에서 쫓겨나야 했고, 청계천 공사로 인해 포장마차들, 줄이어 있던 헌책방들, 그리고 용산 참사도 쫓겨나지 않을 권리를 공권력의 치밀한 작전 속에서 특공경찰에 의해서 무참히 빼앗기고 말았지.

 

 

 

 

 

 

“애초에 백성들이 왜 폐하를 왕으로 삼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왕에게 묻습니다.

 

“폐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를 위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폐하가 전심전력을 다해 그들의 삶을 평안하게 해주고, 부당한 일로부터 보호해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폐하의 사명은 페하의 안전이 아니라 백성의 안녕을 돌봐주는 것입니다.

 

그건 양치기의 사명과 같은 것이지요. 엄밀히 말해, 자신이 아닌 양을 먹이는 것이 양치기의 사명인 것입니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중에서

 

 

 

 

 

올겨울은 예년보다 몹시도 추운 겨울 날씨가 지속이 된다. 그 몹시 추던 어느 날 전기 요금을 내지 못해 전기가 끊겨 촛불을 커놓고 자던 할머니와 살던 어린 손자손녀가 촛불에 의해 발생한 화재에 생명을 잃고 말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또 한 번의 비애를 느껴야 했다.

 

전가가 끊겨 돌아가신 할머니나 할머니의 어린 손자손녀가 747을 이루어 달라고 한 적도 없고, 747의 덕을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아니 7%의 경제성장과 국민소득 4만 달라, 세계의 7대 강국으로의 도약, 그게 도대체 무엇인지도 모르는 분이었을 것이다. 그저 생활에 불편만 없으면 되었던 분이 아니었을까?

 

생활정치란 “전기가 우리 생활에 필요하므로 모두가 전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정치다.”라고 말하는데,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이 사회가 보살펴야 하는 노약자, 힘없는 할머니와 나약한 어린이가 전기가 끊기므로 죽음을 맞이하는 나라. “생활정치는 모든 보통의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정치다.”라는 말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는 생활 정치가 언제나 실현 되려나

 

한 표 한 표를 달라고 할 때는 정말로 밑바닥 인생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너무도 잘도 찾아 다녔던 것처럼, 한 달에 한번, 두 달에 한번 아니 육 개월 그도 아니면 일 년에 한번이라도,

 

한 표를 달라고 찾았던 그 사람들을 찾아가 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듣고 그 이야기를 토대로 정책을 세우고 그 정책에 따라 정치를 한다면 그것이 소통의 정치요, 생활 정치가 아닐까?

 

옛 왕조시대의 구중궁궐의 왕이 하던 방식처럼 푸른 지붕이 있는 집의 울타리 안에 들어앉아 백성과 단절된 채, 왕이 하던 정치를 하다 보니 유토피아는커녕 인간의 가장 기본이 되는 생활 정치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유토피아 (Utopia)’라는 단어는 그리스어의 ‘아니다(ou)’와 ‘장소(topos)’를 합성해 만든 말로서 ‘아무 데도 없는(nowhere)’이라는 뜻이라 하던데, 유토피아와 같은 나라는 있을 수 없는 것일까? 그리고 모든 보통의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정치라는 생활 정치는 할 수 없는 것일까? 또 하나의 의문을 마음에 담으며 책장을 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