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살아가는이야기

이상한 유전자의 이상한 진화

心田農夫 2014. 7. 3. 12:03

 

책을 보다가 비시시 웃음이 나왔다. 얼마 전 우리사회에 친일 논란을 불러일으킨 총리후보 검증사건이 있은 뒤라 책을 보면서“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다.”는 말이 떠오르면서

 

“민족을 배신하고 매국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환경에 잘 적응하는 유전자가 극도로 진화한 인간들이 이구나.”그러니 일제 강점기에는 친일을 하고 강대국 미국이 우리나라를 좌지우지(左之右之)하는 오늘 날에는 뼛속까지 친미라는 말을 하는 구나 생각이 갑자기 들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현실에 적응을 못하기라도 한 듯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자 가정을 돌보지 않고, 자신의 재산과 생명조차 나라를 구하고자 내 놓았던 수많은 애국지사, 독립투사들, 그들은 환경에 적응을 하는 이기적 유전자가 그때그때 적응하도록 진화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내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책을 보면서 한참을 생각을 했다.

 

 

 

                                            프란시스코 고야, <1908년 5월 2일, 프랑스군에 대항하는 마드리드 시민>

                                                  1814년 캔버스에 유채,266X345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플로리안 하이네 지음 ㆍ정연지 옮김 『화가의 눈』에서 인용.

 

 

 

고야는 <1808년 5월 2일, 프랑스군에 대항하는 마드리드 시만>과 마찬가지로 그 그림에서도 역시 폭력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렇다면 고야의 정치적 성향은 어땠을까? 그는 전반적으로 진보적인 친프랑스 성향이었지만, 보수적인 스페인 왕궁에서 카를로스 3세와 카를로스 4세의 궁정화가로 일했다.

 

고야는 카를로스 4세가 프랑스로 망명을 떠나고 나폴레옹의 동생 조세프 보나파르트가 스페인 왕위를 계승했을 때 궁정화가 지위를 잃었지만, 얼마 안 가 다시 새로 부임한 왕의 화가 가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새로운 왕에게 사랑과 신뢰를 바칠 것을 선서했고, 왕으로부터 훈장을 받는가 하면, 실세들을 위한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했다. 그는 프랑스의 진보적 혁명 사상을 흠모해왔기에 때문이다.

 

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군이 떠나고 국민들의 염원대로 페르난도 7세가 왕위에 오르자, 고야는 또다시 새로운 왕실의 궁정화가가 되었다.

 

---------------- 중략 -----------------

 

개인적 삶 속에서 고야는 분명 영웅은 아니었다. 그가 추구한 목표는 오로지 궁정화가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는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다분히 기회주의적으로 비춰질 수 있고, 또 몇몇 상황에서는 실제로도 그러했다.

플로리안 하이네 지음 ㆍ정연지 옮김 『화가의 눈』중에서

 

 

 

                      프란시스코 고야, <1808년 5월 3일, 저항세력 처형>

                1814년 캔버스에 유채,266X345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플로리안 하이네 지음 ㆍ정연지 옮김 『화가의 눈』에서 인용.

 

 

 

위의 글은 어디서 많이 듣고 보았던 내용과 너무도 비슷하지 않은가. 나라가 침략을 당하고 새로운 침략국의 지도자가 나라의 왕이 되자 충성을 맹세하며 훈장을 받고 궁정화가라는 지위를 지키다가, 나라가 해방되자 다시 최고책임자에게 아부(?)하면서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에 급급한 모습, 그 모습은 우리의 친일파들과 너무도 유사하지 않은가.

 

우리의 친일파 들이 늘 내세우는 주장이 있다. 그 시대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노라고, 이 책을 저자도 이렇게 이야기한다. “어쩌면 우리는 화가 고야와 인간 고야를 서로 분리해서 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저자의 말대로 어쩌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책을 읽어 내려가다 보니 고야와는 정반대의 입장인 화가도 있다는 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게 있어 그림은 느낌을 표현하는 다른 말이다.”라는 영국의 화가‘존 컨스터블’이였다.

 

 

                                      존 컨스터블, <건초 마차>, 1821년 켄버스에 유채, 130X185cm, 국립미술관, 런던.

                                             플로리안 하이네 지음 ㆍ정연지 옮김 『화가의 눈』에서 인용.

 

 

컨스터블의 이러한 새로운 시도들과 자연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방식에 대한 평론가와 대중이 처음부터 우호작인 태도를 취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가 심했다.

 

         ---------------- 중략 ----------------

 

영국화가들과 미술사학자인 존 러스킨(1819~11900년)은 그를 거절하면서 그의 작품을 “열등한 자연에 대한 병적인 흠모”라고 비난했다.

 

        ---------------- 중략 ----------------

 

<타임지>는 “힘이 넘치고 장인의 손길이 느껴지는 풍경”이라고 호평하는 한편 “그는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한 구름을 그리고, 전면에 하얀 회칠을 함으로써 훌륭한 풍경을 망쳐버렸다, 이런 행위는 어떤 화가도 자청해서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라는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플로리안 하이네 지음 ㆍ정연지 옮김 『화가의 눈』중에서

 

 

 

 

 

                                                          존 커스터블, <들판에서 바라본 솔즈베리 대성당>,

                                                   1831년경, 캔버스에 유채,151.8X189.9cm, 국립미술관,  런턴.

                                               플로리안 하이네 지음 ㆍ정연지 옮김 『화가의 눈』에서 인용.

 

 

영국의 화가들은 사실적인 자연의 모습을 소재로 캔버스에 풍경화를 그리는 것을 명예롭지 못한 일이라고 했단다. 그런 사고가 전반적인 분위기에서 영국인들은 컨스터블의 그림에 대하여 비판을 하였으나 프랑스에서는 그의 그림을 인정하여주는 한편 컨스터블의 많은 그림을 구입해 주었다. 그리고 그를 프랑스로 오기를 간청했다한다.

 

 

컨스터블은 생전에 그림을 많이 팔지 못했고, 그나마 팔린 그림도 프랑스 고객들이 구입한 것이었다. 자신의 조국에서 오랫동안 외면 받았던 컨스터블의 작품은 프랑스에서 인정받았다.

 

컨스터블의 그림은 들라크루아뿐만 아니라 바르비종파, 더 나아가서는 인상파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쳐다. 하지만 컨스터블은 프랑스의 간청에도 불고하고 단 한 번도 프랑스를 방문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나는 외국에 사는 부자보다는 (영국에서 사는) 거지이고 싶노라.”라는 그의 생각을 굳건히 지킨 것이다.

      플로리안 하이네 지음 ㆍ정연지 옮김 『화가의 눈』중에서

 

 

물론 컨스터블의 경우는 나라를 찬탈당한 경우가 아니기는 해도 그의 작품에 대해 조국에서 비평을 받고 그림이 팔리지 않아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도 조국을 떠나지 않으려는 그의 조국애는 참으로 본받을 만 한 것이 아닐까.

그의 “나는 외국에 사는 부자보다는 (영국에서 사는) 거지이고 싶노라.”는 말에서 느낄 수 있는 컨스터블의 강인한 조국에는, 만약 조국이 찬탈 당했다 하여도 결국 변절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한다.

 

이러한 글을 읽으면서 리처드 도킨스의『이기적 유전자』를 떠올렸다. 생존을 위해서, 종적 번식을 위해서 진화하는 이기적 유전자. 친일ㆍ친미파라는 인간들은 아마도 이런 이기적유전자가 빠르게 진화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이 나라에 친일ㆍ친미파가 넘쳐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하면서 씁쓰레한 미소를 지어본다.

 

 

 

 

28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