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살아가는이야기

인연 따라 왔다, 인연 따라 가네.

心田農夫 2014. 7. 15. 17:16

 

 

 

 

날은 차고 밤은 길며 바람은 쓸쓸히 부는데, 기러기는 남쪽으로 날아가고 초목은 누렇게 시들에 떨어지누나. 나 도연명은 이제 잠시 머물던 인생이라는 여관과 작별하고 영원히 본래의 집으로 돌아가노라“

 

“운명이라는 것을 잘 안다 해도 누군들 뒤돌다보지 않으리오. 나는 이제 이렇게 죽어도 여한이 없네.”

                                도연명의 『自祭文』의 일부 인용

 

 

 

 

 

 

시인 도연명은 이세상의 삶을 잠시 머물던 인생이라는 여관과 작별하고 영원한 본래의 집으로 돌아간다고 말을 하고, 천상병 시인은 아름다운 이 세상에 소풍을 왔었노라 말한다. 그 아름다운 소풍이 끝나는 날 본향에 가서 아름다웠다 말하겠노라 말한다.

 

많은 사람들아 죽음을 앞두고 위의 두 시인처럼 저렇게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맞이할 수 있을까? 하기는 중국 속담에 “인지장사(人之將死) 기언야선(其言也善)”란 말이 있다. 즉 임종을 앞둔 사람의 말은 진실 되고 품성은 착해진다는 말로 인간의 참 본성이 회복되면서 인성이 밝아진다는 것이다.

 

 

 

 

 

 

 귀천(歸天)

 

                   천 상 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이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어제부터 다시 복귀를 해 출근을 하여 평상시처럼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일을 하다 문뜩 문뜩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은 생각에 잠기고는 한다. 그것은 갑자기 중병에 걸려서도 아니요. 살아온 날 보다 살아가야 할 날이 분명 짧음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다.

 

20대부터 삶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인가를 생각했었고 그런 연유에서 철학책을 뒤지기고 했고 그러다 발견한 책『티베트 사자의 서』를 마주하고 심취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 때에는 종교에 심혈을 기울여 보기도 했다.

 

 

 

 

 

 

“죽음을 이해하려면 삶 전체를 이해해야 한다. 대부분의 우리들처럼, 그 중 한 가지만 가지고 그렇게 단편적으로 살면 안 된다. 삶에 대한 바로 그 이해 속에 죽음에 대한 이해가 있다. 그 둘은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살아있음 속에 죽음이 있는 까닭에 살아있음과 죽음이 구별되지 않는다. 삶과 죽음이 분리되지 않는다. 사람은 마음이 매 순간 죽어가는 까닭에 죽음을 알고 있으며, 바로 그 끝에 새로 태어남ㆍ새로워짐ㆍ신선함ㆍ순결함이 있다.”

 

“죽음은 삶의 매순간 여기에 있다. 일단 이 사실을 알고 나면 그대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크리슈나무르티『삷과 죽음에 대하여』중에서

 

 

 

 

 

 

전화기 벨이 울리고 가녀리고 조심스런 목소리로 묻는다. “지ㆍ아 아버지 전화입니까”나이가 동갑이라 초등학교 동창이기도한 외국어대학교 교수로 있는 여 사촌이었다. “고모님이 돌아 가셨어”그렇게 고모님의 부음소식을 점하고 서둘러 정리하고 공주로 올라갔다.

 

목사의 아내가 되어 목사님을 보필하면서 평생을 불우한 사람들을 도우며 한 평생 신앙으로 살아왔던 고모의 일생, 그러나 일평생을 사시면서 단 한명의 자녀도 두지 못하셨다.

 

고모부님이 은퇴를 하고 원로원에서 노후를 함께 지내시다 고모부님이 먼저 떠나시고 늘 외롭게 혼자 지내시다 생을 다하시고 이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도 가셨다.

 

 

 

 

 

 

혼자 사셨기에 임종을 지켜주는 이 없이 떠나 가셨지만, 원로원의 목사님의 이야기에 의하면 새벽 기도에 불참하시어 들려다 보니 방금 떠나셨는지 몸이 따스한 것으로 볼 때에 주무시는 동안 돌아가셨는지 그 모습도 주무시는 듯 평온한 모습이었다고 전해 주신다.

 

아버지 생전에는 홀로된 동생이 안쓰러웠던지 보고 싶다고 나를 앞세우셔서 간간히 찾아뵈었는데, 아버지 떠나시고 삶의 울타리에 갇혀 지내면서 찾아뵙지를 못하여 불효를 저지르고 말았다.

 

『천자문』에 부모님이 안 계시면 백부(伯父)ㆍ숙부(叔父)ㆍ고모(姑母)는 부모와 같다하였는데, 자식도 없는 고모니 조카가 자식인 것을, 자식으로 도리를 하지를 못했다. 고모가 떠난 이제 가슴에 불효자라는 응어리를 지고 살게 되었다.

 

 

 

 

 

 

인간은 후회를 먹고 사는 생물이다. 환자들은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회한을 품는다. 그러나 후회의 정도에는 사람마다 큰 차이가 있다. 당연하지만,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은 후회가 적다. 죽음을 염두에 둔 사람은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알고 열심히 살아간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며 순간순간 스쳐지나가는 인연을 소중히 여기면서‥‥‥‥.

 

실재로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에 “선생님.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환자도, 아주 드물지만, 분명히 있었다.

        오츠 슈이치『죽을 때에 후회하는 스물다섯가지』중에서

 

 

 

 

 

 

어른들 말씀에 잠자다 저세상에 가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그것이 복이라는 말씀도 하신다. 나의 고모님은 그렇게 주무시는 가운데 조용히 이 세상을 뒤로 하고 당신이 믿고 희망하던 하늘나라로의 여행을 떠나셨다.

 

이세상에서 고모와 조카라는 인연으로 우리는 만나서, 가족이란 인연의 끈으로 정을 엮으며 우리는 살아왔다. 이제 고모님은 그 인연의 끈을 조심조심 풀어두시고 우리 조카들의 마지막 배웅을 받으며 고모님은 고요히 저세상으로의 길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으셨다.

 

고모! 우리 조카들이 이세상을 떠나 저세상으로 가면, 그때에 다시 만나 고모와 조카라는 인연의 끈을 다시 엮어보아요. 그래 이세상에서 못 다한 이야기해요. 고모! 고모 사랑해요. 안녕히 가세요.

 

 

 

 

 

 

생에 크고 작은 인연이란 따로 없다. 우리가 얼마나 크고 작게 느끼는가에 모든 인연은 그 무게와 질감, 부피와 색채가 변할 것이다. 운명이 그러하듯 인연의 크고 작음 또한 우리들의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 아닐까?

                                        최인호의『인연』중에서

 

 

 

 

28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