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살아가는이야기

이만하면 넉넉한데 뭘 더 바라겠나.

心田農夫 2015. 9. 5. 14:16

 

 

 

산중문답(山中問答)

                         조 지 훈

 

새벽닭 울 때 들에 나가 일하고

달 비친 개울에 호미 씻고 돌아오는

그 맛을 자네 아능가

 

마당 가 멍석자리 쌉쌀개도 같이 앉아

저녁을 먹네

아무데나 누워서 드렁드렁 코를 골다가

심심하면 퉁소나 한가락 부는

이런 맛을 자네가 아능가

 

구름 속에 들어가 아내랑 밭을 매면

늙은 애내도 이뻐 뵈내

비온 뒤 앞개울 고기

아이들 데리고 낚는 맛을

자네 太古적 살림이라꼬 웃을라능가

 

큰일 한다고 고장 버리고 떠나간 사람

잘 되어 오는 놈 하나 없데

소원이 뭐가 있능고

해마다 해마다 시절이나 틀림없으라고

비는 것뿐이제

 

마음 편케 살 수 있도록

그 사람들 나라일이나 잘하라꼬 하게

내사 다른 소원 아무것도 없네

자네 이 마음을 아능가

 

老人은 눈을 감고 환하게 웃으며

막걸리 한 잔을 따뤄 주신다.

예 이 맛은 알 만 합니더

靑山 白雲

할 말이 없다.

 

 

 

 

 

젊은 시절 지금의 나이쯤 되면 조용한 시골에가 값싼 초가집 한 채 사서 텃밭에 채소 가꾸면서 살리라 생각을 하였고 이제 초로에 들어섰지만 가진 것 한 푼 없으면서 그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작년까지 귀농귀촌 학교에 등록하여 귀촌에 관한 공부를 하고는 했다. 올해 들어서면서 그 꿈을 접기로 했다.

 

부모님이 이북에서 월남을 한 가족이다 보니 이 남쪽에는 땅뙈기 한 뼘도 없다. 부모님 말씀에 이북에는 집도 있고 땅도 있고 과수원도 있다하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기에 통일이 되면 나도 고향에 가서 살면 되리라 생각을 하였지만, 작금의 정세를 보면 유원한 것이 통일이다.

 

두 딸아이 뒷바라지에 남들 다한다는 노후준비는 염두에 두지도 못하지만 부모로서의 책무는 다하리라 마음을 먹고 지금까지 나름대로 풍족하게는 못해주었어도 알바 할 시간에 공부를 더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에 아직 두 딸은 알바하지 않고 공부만 하고 있다.

 

 

 

 

 

 

여덟 가지 넉넉함

 

토란국과 보리밥을 배불리 넉넉하게 먹고,

부들자리와 따뜻한 온돌에서 잠을 넉넉하게 자고,

땅에서 솟는 맑은 샘물을 넉넉하게 마시고,

서가에 가득한 책을 넉넉하게 보고,

봄날에는 꽃을 가을에는 달빛을 넉넉하게 감상하고,

새들의 지저귐과 솔바람소리를 넉넉하게 듣고,

눈 속에 핀 매화와 서리 맞은 국화에서는 향기를 맡는다네.

한 가지 더, 이 일곱 가지를 넉넉하게 즐기기에 팔여라고 했네.

                        안대희 지음 선비답게 산다는 것 중에서

 

해의

1485~1541년까지 살다간 사재 김정국의 말이다. 기묘사화 때 정계에서 축출당한 후에 벼슬 살 때와는 생활이 완전히 바뀌자 사재는 아예 호를 팔여거사(八餘居士)라고 고쳤다. 어느 날 친구가 생뚱맞은 새 호의 뜻을 물었을 때에 벼슬 살 때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생활이지만, 여덟 가지 넉넉한 것이 있다는 의미라고 대꾸를 하면서 한 말이다.

 

 

 

 

 

 

인생살이 월래부터 괴로운 것이라 했던가. 나와 비슷한 세대들 세상살이 힘든 줄 알면서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지내왔다. 먹고 싶어도 먹을 것이 없어 배도 곪아보았고 배우고 싶어도 돈이 없어 배우지 못해서 서러움도 많이 받아오면서 살아왔던 세대들이 이제 초로에 들어서있다.

 

이 초로의 신사들 대부분은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도 없고 오직 자신의 힘으로 뼈골 부서지도록 일을 하면서 아래로는 자식들의 성공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면서 위로는 부모님에게 효도는 못해도 자식으로 부모님에 대한 도리는 하면서 살아왔던 세대이다. 그래서 낀 세대라 하던가?

 

어머님은 일찍 돌아가셨기에 효도는 고사하고 자식으로서의 최소한의 도리라는 결혼을 하고 자손을 안겨드리지 못했으니 불효 중에 불효를 저질렀고 그나마 아버님은 막내로서 한집에서 십여 년을 함께 살았으니 최소한의 자식으로서 작은 도리를 하기는 했다.

 

 

 

 

 

 

그래도 우리세대들 중에서 나는 행복한 편이다. 배우지 못한 설음에 철이 들면서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낮에는 직장에서 직장인으로 땀 흘리며 열심히 일을 했고 밤에는 학생으로 밤을 하야케 지새우며 공부를 하는 이중생활을 하면서 이제는 배운 놈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는 되었으니 어이 행복하지 않겠는가.

 

물론 배움에 어이 끝이 있겠는가마는 그래도 마지막 단계라는 학위에 등록을 하였다가 집사람 왈 그 나이에 그만큼 했으면 대단한 것인데, 장사는 점점 안 되는데, 써먹지 못할 공부를 한다고 아이들 대학에 못 보내면 어쩌려고 하느냐.” 말 한 마디에 며칠을 고민 고민 하다 포기하기로 맘을 굳히고 학교에 연락을 하여 포기각서와 몇 가지 서류를 학교에 제출하고 4,683,000원 전액을 환불 받고 꿈을 접었었다.

 

 

 

 

 

 

어느 날 아침 내 둘레를 돌아보고 새삼스레 느낀 일인데, 내 둘레에 무엇이 있는가 하고 자문해 보았다. 차와 책과 음악이 떠올랐다. 마실 차가 있고, 읽을 책이 있고 듣고 즐기는 음악이 있음에 저절로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오두막살림살이 이만하면 넉넉하구나 싶었다. 차와 책과 음악이 곁에 있어 내 삶에 생기를 북돋아 주고 나를 녹슬지 않게 거들어 주고 있음에 그저 고마울 뿐이다.

 

                                                법정스님 지음 아룸다운 마무리중에서

 

 

 

 

 

 

처녀가 시집 안 간다는 말, 노인 어른들 이제 그만 죽어야지 하시는 말씀, 장사가 밑진다는 말을 삼대 거짓말이라 한다던가? 그 거짓말을 하는 장사치로서 나는 재능이 벌로 없었던 것 같다. 같은 업을 하시는 분을 보니 이모임 저모임 가입을 하여 회원들에게 장사를 하던데, 찾아오는 회원들이나 동기들에게 돈을 안 받으니 장사재능 점수는 영 시원찮은 편이다.

 

장사를 처음 시작하면서 늘 스스로 체질이 아닌데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 늘 가격을 깎는 제미(?)가있어서 인지, 늘 흥정을 하려하는데 적당히 깎아주는 멋(?)을 부려야 하는데, 정가를 고집하다보니 그냥 보내거나 아니면 다툼으로 이어지고는 했다. 그래서 유도리가 없는 사람, 원리원칙 좋아하는 사람이라 하면서 그러면 장사 못하지 하는 소리도 수없이 듣고는 했다.

 

정당히 깎아주는 척하면서 그만큼 값싼 물건으로 대체하여 주면 되련만, 그 일을 그때나 지금이나 못한다. 그래도 돈은 못 벌였어도 망하지 않고 이렇게 장사치로 남아있다. 나보다 적은 나이의 사람들은 정년퇴직 했건만, 정년이 정해있지 않은 나는 아직 직장이라는 곳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어엿한 직장인이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이만하면 넉넉한데 뭘 더 바라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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