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에 대하여 생각하기

역사는 역사일 뿐 나와 관계가 없다는 마음일까?

心田農夫 2015. 9. 10. 18:05

 

                                              

일요일 오전에 세차게 내리던 비가 오후가 되면서 기운이 약해지고 그 굵기도 작아지면서 오다가 그치고 다시 오다 그치기를 반복한다. 두시가 넘으니 비가 멈춘 것을 보고 집사람이 지루했던지 구룡포 근대문화 역사거리를 가보지지 않을래요? 묻기에 가고 싶으면 가지하고는 나섰다. 40여분을 달려서 도착한 구룡포.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길을 건너니 바로 근대문화 역사거리입구이다.

 

 

                                                <구룡포 근대문화 역사 거리 입구 >

 

일본인들이 이곳 구룡포로 이주가 시작된 것은 100여 년 전인 1906년 가가와현 어업단 소전조(小田組) 80여척이 고등어 등 어류 떼를 따라 구룡포에 오기 시작하면서 일본인들은 구룡포에 방파재와 부두를 건설해 어업전진기지로 만들고 이후 고등어어업의 대근거지가 되면서 일본인들이 대거 구룡포로 이주를 시작해 1923287가구 1,161명이 거주를 했다고 한다.

 

 

                        <일본의 가난한 어부들이 고등어 떼를 따라 구룡포에 오기 시작한 경로>    

 

그때 당시 이 거리에는 선박경영과 선어운반업, 통조림 가공공장 등을 운영하여 부유해진 일본인들이 하나 둘 가옥을 지었고 업종도 다양해져 음식점, 제과점, 어구류 판매점, 술집, 백화점, 치과, 병원 등 업종도 다양해지면서 구룡포 지역의 최대 번화한 상업지구로 성장했다고 한다.

 

 

 

 

                              <근대문화 역사 거리의 풍경>        

 

이 거리가 번성하게 된 것은 구룡포 방파제 축조와 도로건설에 참여한 도가와 야스브로의 공이 크다하여 그를 기념하기 위해 일본에서 규화목을 가져와 해방 전 해인 1944년에 송덕비를 세웠다고 한다. 기념공원 위쪽에는 학교도 세워 지금의 중학교 과정을 가르쳤고 해방 후에는 구룡포초등학교 구동분교로 초등학생들을 교육하였으나, 몇 년 전 폐교된 상태로 흉물스럽게 남아있다.

 

 

           <일본인들이 세웠던 학교, 구룡포초등학교 구동분교 이제는 폐교가 되었다.

<사람들은 기념공원까지만 구경하고 돌아가고 생생한 역사의 현장인 공원 뒤 언덕을 올라가 자리하고 있는 학교를 찾는 사람은 없었다.>

 

 

일본이 패망하여 일본인들이 떠나가자 도가와 야스브로 송덕비는 구룡포 주민들이 시멘트로 글 위에 덧칠을 하여 지금은 그 글의 내용을 알 수 없으나 그 당시의 위용을 자랑하듯 덩그렇게 세워져있었다. 그리고 기념공원에 일본인들이 신을 모시던 신사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어민들의 풍어와 안전조업을 기원하기 위한 용왕당과 대한민국 국권을 해복하기 위해 포항지역에서 일제에 항거하다 돌아가신 호국영령들의 순고한 희생정신과 애국정신을 그리고 그들의 혼을 위로하기 위한 충혼탑과 충혼각이 세워져있다.

 

 

                      <도가와 야스브로 송덕비, 시멘트를 덧칠 되어있다.> 

 

 

 

역사는 한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에 대해서도 마땅히 수행해야 할 진로를 제시한다. 그 점에서도 역사의 의미는 뚜렷하다.

역사는 인류사의 진행과장을 통해 정의의 길과 불의의 길, 인류의 풍요롭게 하는 길과 멸망으로 이끄는 길, 협력평화를 추구하는 길과 갈등전쟁의 길이 어떤 길이었는지를 밝혀준다.

                             이만열 산문집 잊히지 않는 것과 잊을 수 없는 것중에서

 

 

 

       <기념공원에 있는 구룡 조형물, 이곳에서 일본옷입고 사진 촬영을 제일 많이 하더군.>

 

이러한 정신이 깃들어 있는 기념공원 안에서는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옷깃도 여미는 것이 도리인데, 연인들인 듯한 남녀들, 그리고 어린이와 함께 한 부모들이 일본의상 체험이라는 가게에서 일본 옷을 빌려서 입고 공원 안 이곳저곳을 서성이면서 사진촬영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들의 도가와 야스브로 송덕비나 용왕당, 그리고 충혼탑과 충혼각 앞에 세워져 있는 설명표지판에는 관심도 없고 읽어볼 생각도 없어 보인다.

 

 

                                                <기념공원 안쪽 좌측에 자리한 용왕당 건물>

 

1920년대 가가와현에서 온 하시모토 젠기치가 살림집으로 지은 2층 일본식 목조 가옥은 일본에서 건축자재를 직접 가지고와 지은 건물로 잘 보존 되어 있어서 지금 근대 역사관으로 사용하는 건물로 문화 해설사들도 있었다. 서너 분이 계셨는데,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었다.

 

 

                         <하시모토 전기치가 살림집, 지금은 근대역사관으로 사용하고 있음.>

 

일층과 이층을 관람하고 나오면서 해설을 부탁드려 한 십 여분 해설을 듣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삼십 여분 나누었는데. 하시는 말씀이 이 가옥에 대하여 설명을 해준데도 시간이 없다며 휭하니 둘러보고는 그냥 가는 가하면 초등학교 4학년 학생들이 단체로 왔기에 우리나라가 해방된 해를 물었더니 모른다고 해서, 인솔선생님에게 역사를 안 가르치느냐 물었더니 조금 더 있어야 배운다는 말씀을 하시면 내가 학교이름은 안 밝히겠다.”하시며 전혀 역사의식이 없다 말씀하신다.

 

 

                                   <하시모토 전기치가 살림집  2층 복도 모습. 이 복도를 통해서

                                                     각 방으로 들어가는 구조였다.>      

                <하시모토 전기치가 생활하던 모습을 재현 해 놓은 2층 안방과 딸의 방과 1층 부엌 모습 >

 

그리고는 한 말씀 더하시겠다며, 우리나라와 일본 간에 독도문제가 심각하던 때에 일본의 신문사에서 이곳을 취재하라고 기자를 보냈는데, 그 기자 한국에 가면 한국인들에게 모멸을 받으리라 걱정을 하고 왔는데, 막상 와서 보니 한국인들 일본 옷도 입고 다니고, 독도에 대해서 물었더니 별관심이 없다하기에, 일본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 물으니 잘사는 나라,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며 자신을 너무도 잘 대해주기에 한국인들 참으로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해설사인 자신에게 말하더란다.

 

 

                                           <기념 공원 안쪽 중앙에 자리한 충혼각 모습>

 

          남명 조식은 유람을 하면서

산을 보고 물을 보고, 그리고 역사 속의 고인을 보고

그들이 살던 세상을 보라(看水看山 看人看世)”고 했다.

나는 이 여덟 자를 남명의 산수유람관으로 적출해,

산수를 보는 잠명(箴銘)으로 삼고 있다.

                                                           구효서 지음 길위의 인문학중에서

 

 

 

말씀하시면 긴 한숨을 내쉬는 백발의 해설사 할머니에게 일본이 우리를 그렇게 대하는 것은 다 우리들이 처신을 잘못해서라고 말씀드렸다. 친일파의 후손들을 위정자로 뽑아주는 한심한 국민들, 사대주의에 물들어 친미요 친일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국민들, 이 대한민국 땅, 구룡포에 근대문화 역사의 거리에 즐비하게 세워진 일본의 가옥에 대한 이력이나 역사에 대하여서는 무관심하고 무슨 관광지 구경하듯 사진만 촬영하고 돌아가는 사람들,

 

 

 

 

대대로 전승되어온 우리의 전통가옥을 조선집 또는 기와집, 재래식집이라 하면 될 것을 일본인들이 부른 던대로 한옥(韓屋)(1907년 처음으로 한옥이라 사용함) 이라 하고 우리의 전래된 옷을 조선옷 또는 재래 옷이라면 될 것을 한복이라고 부른 나라, 그것을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다보니 이제는 한옥, 한복이란 말이 굳어졌고

 

 

< "우리민족의 아팠던 역사" "일본에 의해 착쥐되었던 우리 경재와 생활문화를 기억하는 산 교육위 장으로 삼고자 구룡포 근대문화 역사의 거리를 조성한다"  는 안내 문구를 읽어나 보았을까?>

 

언제가 일본인들이 잔재를 고치자고 국민학교라는 말은 일본이 만들었다고 하여 초등학교라고 고쳐서 사용하고 있는 현실에서 세월을 거꾸로 가자는 것인지, 역사를 왜곡하는 친일파 후손들에 의해 이제는 광복절이 아니라 건국절이라해야 한다고 하지 않나 자신의 나라역사를 국사라고 해야지 자신이 외국인 것처럼 한국사라 하지를 않나, 학생들의 교과서의 제목도 역사, 국사에서 한국사로 표기가 굳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그 당시에 사진이 있기에 복사를 해 보았다.>

 

어이 그것뿐이라 일본정부의 인사가 아닌 대한민국의 외교를 담당하는 현 정부의 외교부 고위공직자는 한일협정으로 일본에 대한 청구는 다이루어 졌기 때문에 청구권을 소멸되었다며 TV에 나와 당당히(?)말하고 있는 모습에서 기가 차다.

 

 

                            <근대문화 역사 거리에 있는 집의 모습>   

 

군 위안부 문제, 탄광, 공장 등에서 노동착치를 당한 근로자들의 임금 문제 등을 정부차원에서 도와주어야 하는 인간이 청구권을 소멸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외교부 공직자가 있는 나라. 그러니 미군 포로들에게 했던 일과 중국인들에 했던 처사는 사과를 해도 일본은 아직까지 한국에 대하여 사고를 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이는 그들의 탓이 아니요 우리의 탓인 것을 어찌하랴.

 

 

                          <드라마 '명의 눈동자'를 촬영했던 집이란다.>

 

백발의 근대문화 역사 거리 해설사 할머니와 긴 대화를 마치고 돌아서려니 등 뒤로 긴 한숨이 따라온다. 그곳에 왜? 일본인들이 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었었나. ? 포항시에서 돈을 들여서 보존을 하고 있나, 한번쯤 생각하면서 관광을 할 수는 없는 것일까? 근대문화 역사 거리 입구에 고풍스레 서있는 문을 나서려니 씁쓸한 마음이 날씨만큼이나 기분이 울쩍하여 집 앞 점포에서 포항막걸리 한 병사 들고 들어와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