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살아가는이야기

그대는 무엇을 믿고, 왜 믿는가?

心田農夫 2016. 6. 11. 17:38

 

살아가면 만나게 되는 종교인들, 그들을 대할 때마다 의구심을 갖는 것이 있다. 무엇을 믿고, 왜 믿는지? 종교인이라 불리는 사람들 대다수의 신앙관을 보게 되면 남이 잘되기 보다는 자신을 위한 기복신앙(祈福信仰)관을 가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즉 신들을 자신들의 세속적인 욕망을 청탁하면 들어주는 유능한 마술사쯤으로 생각을 하고 있는 것만 같다.

 

대다수의 종교에서 말하는 것을 보게 되면 이기심보다는 이타심을 말하며 법회나, 미사나, 예배에서 신도들에게 설법이나 강론이나 설교를 통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의 자비, 천주고와 기독교의 사랑은, 더불어 사는 이 세상에서 정말로 필요한 것이 나눔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자비심이요, 애정담긴 사랑일 것이다.



우리는 지구상의 50억에 달하는 인간 중에 대충 1,20억의 사람들만이 진실한 종교인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진실한 종교인이라고 말할 때,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 종교인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나는 기독교인이다라고 쉽게 말하지만, 일상생활 속에서 기독교 신앙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믿음을 실천하지고 않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을 제외하면, 진실하게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많아야 10억 명 정도에 불과 할 것입니다. 이 말은 그 나머지 40억 명, 다시 말해 지구상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신앙인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 합니다.

 

달라이 라마하워드 커틀러 지음, 류시화 옮김,달라이 라마의 행복론중에서





그러나 대다수의 종교인들은 법회가 끝나고 사찰을 나서는 순간에, 미사를 마치고 성당 문을 나서는 시점에, 그리고 예배를 마치고 교회의 십자가를 뒤로 하고 교회 밖으로 첫 걸음을 내 딛는 그 때에, 마음 가득 담았던 자비도 사랑도 사찰 안에, 성당 안에, 교회 안에, 그대로 두고 나오는 것은 아닌지?

       

언제가 일요일 오일장에서 보았던 광경이 새삼 눈에 선하게 보입니다. 일요일에 서게 되었던 장날에 예배를 마치고 교회를 나서며 길가에 주저앉자 작은 상자위에 시금치를 비롯한 두세 종류의 나물을 팔고 계시는 할머니에게 다가가 얼마나 묻으며 천원이라고 하자 달라고 하여 봉지에 담아 건네는데,

 

그 중년의 여인 손을 내밀어 옆에 있던 더미에서 얼른 한 움큼 더 잡어서 봉지에 넣고는 천 원짜리 한 장 놓고는 돌아선다. 순간의 일이라 할머니 안 되는데하시지만, 벌써 두세 발짝 걸어가는 중년의 여인 등 뒤로 권사라는 것이, 믿는 것들이 더해라는 혼자 말씀을 하신다.


 



예수는 종교적 회심을 촉구하는 게 아니라 더 근본적인 회심을 촉구한다. 예수는 지금까지의 삶의 태도와 방식을 완전히 뒤집을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삶의 태도와 방식을 완전히 뒤집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라는 말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려면 먼저 내 삶의 태도와 방식을 완전히 뒤집어야 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김규항 지음 예수전인용





장사치인 이 사람도 때때로 그러한 일을 당한다. 불심이 깊고, 신앙이 두터운 분들이란다. 그런 사람들 들어와서 꼭 하는 말들이 있다. “절에 다니세요?” “하나님 믿으세요.”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러면 복 받고 장사도 잘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가격을 깎아달라고 하지를 않나, 나는 손님이니 당연히 갑의 행사를 해야 한다는 듯, 생트집을 부리는 분들의 대다수가 종교인들로 오래 다녀서 인지 보살님’ ‘수사님’ ‘권사님’ ‘장로님등으로 불리는 것을 듣게 된다.

어느 날에는 승복을 입고 걸망을 메고 커다란 염주를 목에 건 스님이 점포 문 앞에서 목탁을 치시며 중창불사 시주로 복 받으세요.”하시고, 어느 날에는 점포 문을 밀고 들어와 천국을 가려면 하나님 믿어야 한다.”라며 교회에 나오라면서 전도지를 준다. 누구를 위한 탁발이고 누구를 위한 전도인지 무지한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교회와 교리의 테두리 안에 있지 않아도 심지어 교회와 교리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다 해도 하느님 나라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면 진정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지만, 교회와 교리의 테두리 안에서 제아무리 성실하고 충성스럽다 해도 하느님 나라 운동에 참여하고 있지 안다면 진정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김규항 지음 예수전인용






전정한 포교나 전도라는 것을 무슨 행사 치르듯 형식에 의해 아니면 주어진 임무처럼 가가호호 방문을 하면서 포교를 하고 전도를 하는 것이 정말 진정성이 있는 것인지? 가가호호 방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평시 생활에서 부처를 느끼게 하는 신도들의 모습, 일상생활에서 예수를 보게 하는 교인들의 행동이 진정한 포교요 전도가 아니겠는가? 꽃들은 벌 나비를 찾아다니지 아니한다. 아름다운 모습보이며, 달콤한 향기를 내고 몸속에 꿀을 품음으로 벌과 나비가 찾아오게 만드는 것이다.

 

오래전에 이웃했던 중년부부가 떠오른다. 일명 노가다라는 막일을 하는 부부인데, 힘든 하루의 일을 마치면 집으로 가기 전 교회에 들려서 잠시 기도를 하고는 피곤한 몸일 텐데도 교회에서 이모저모 봉사를 하는데, 그 얼굴엔 피곤은 보이지 않고 언제나 환한 웃음이 가득했던 부부의 모습이었다. 그 부부의 살아가는 모습에서 나도 저런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다. 무엇이 그들을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했던 것일까? 그들은 말했었다. “범사에 감사하라. 라는 기쁜 소식이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우리의 삶에서 영적인 차원을 갖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종교적인 신앙이 하나의 영적인 차원이 된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종교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가 어떤 종교를 믿는다면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종교적인 신앙이 없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잘 지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엔 훨씬 잘 지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개인적인 권리입니다. 신앙을 갖기 바란다면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도 괜찮은 일입니다.

 

하지만 또 다른 차원의 영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기본적인 영성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를테면 선함, 친절, 자비, 그리고 관심 같은 기본적인 인간의 특성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종교를 믿든 안 믿든 이런 종류의 영성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PP338~339

 

달라이 라마하워드 커틀러 지음, 류시화 옮김,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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