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살아가는이야기

지식인들의 일그러진 언어 습과

心田農夫 2017. 6. 21. 12:29

 


 

위의 제목은 여행 작가 한비야선생의 글에서 인용한 것이다. 책을 보다. 절반을 넘어서 읽게 되면 다음 읽을 책을 미리 주문하고는 하는데, 때로는 다 읽을 때까지 주문을 못할 때가 있다. 일이 바빠 미처 주문을 못해서이고 미처 읽을 만한 책을 선정하지 못해서 이기도 하다. 그러면 두 딸의 방에 들어가 본다. 혹이라도 딸아이들이 읽던 책 중에 읽은 만한 게 있나 둘러본다.

 

 


 

한비야선생의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도 그래서 읽게 된 책이다. 첫째 딸아이 방에 있기에 가져다 보았던 책이다. 읽은 지가 벌써 한참이나 지났는데, <유식한 지식인의 무식한 처사>를 써 블러그에 올렸는데. 올렸던 내용을 다시 읽다 문뜩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에서 한비야선생도 나와 같은 생각을 책에 적었던 것이 문뜩 생각이 났다.

 

 


 

 

영어를 통한 국제화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영어가 이미 명실상부한 국제어가 되었고, 머지않은 장래에 공식, 비공식 만국 공용어노릇을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영어는 목적이 아니라 단지 실용적인 도구일 뿐이라는 점이다.(이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이 있지만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내가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국제화라는 미명아래 영어가 일상화, 일반화되는 과정에서 우리말이 제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점이다.

                                                                     한비야의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중에서

 


 

 

생활전반에 늘 책과 함께하다보니 아내 뿐 아니라 지인들로부터 책 중독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일을 하다가도 잠시라도 짬이 나면 그냥 있지 못한다. 직장에서 뿐 아니라 여행 중에도 반드시 책과 동반을 하고 딸들이 있는 서울에 갈 때 KTX 열차(열차이름이 영어라 그대로 쓴다.) 탐승하여 자리에 앉자마자 독서 등을 켜놓고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책을 보면서 간다. 이렇게 책을 보는 것이 일상화 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책을 많이 본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한참 몰입하여 책을 읽다 불쑥 모르는 외국어가 나타나면 첨 난감하다. 물론 앞뒤의 문장을 연결하여 대충의 뜻을 이해하기도 하지만, 그렇게라도 이해가 되는 것은 괜찮은 편이지만, 앞뒤 문장으로도 이해가 안 되는 경우 그냥 넘어가자니 내용을 이해 못하겠고 그 단어를 찾아 한참을 헤매다 보면 집중도가 떨어지며 산만해져 독서의 맥이 끊기고 만다. 막상 몰랐던 단어를 찾아보면 우리글로 적어도 될 것을 왜 이렇게 외국어로 적었을까? 그래야 작가의 지명도가 올라가는 것인지. 그래야 책이 많이 팔리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지식인들의 일그러진 언어 습관이 그 대표적인 예다. 교육수준이 높을수록 우리말을 하면서 영어 등의 외국어를 섞어 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전문 직업인이나 사회 지도층이라는 사람과 단 10분만 대화해보라. 무차별로 영어를 섞어 쓴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런 현상이 제발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 한해서 예외적인 것이었으면 좋겠는데, 안타깝게도 그건 아닌 것 같다.

                                                                        한비야의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중에서

 

  

 

 

그렇게 뜻을 찾은 외국어 단어는 확실한 뜻을 이해하기 위해 그 단어를 노트에 적어놓는다. 그리고 틈틈이 그것에 대하여 공부를 한다. 그래서 책한 권 읽으면서 두 권의 노트를 필요로 한다. 하나는 간간히 나오는 외국어 단어와 뜻을 적고 다른 한권은 책을 다 읽고 난후에 독후감을 기록하는 것이다. 그렇게 외국어의 뜻을 적은 노트가 네다섯 권이나 된다. 어찌 보면 그만큼 내 자신 외국어에 문외한이라는 뜻 일 것이다.

 

 


 

그렇게 외국어 단어를 찾을 때마다 생각하는 것이지만, 우리의 문학작품들이 외국어를 섞어 쓰다 보니 단 한 번도 노벨문학상을 못 받은 것이 아닐까? 정부에서 언제가 서울대학교 젊은 교수들을 뽑아 1010억 원울 지원하는 노벨상 프로젝트라는 것을 추진했다. 그 프로젝트라는 것이 문학상만을 위한 것이 아니지만 그리고 지금도 추진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프로젝트 말고 1948년도에 제정되었던 모든 공문서를 한글로 쓸 것을 규정한 한글전용법처럼 법률로 문학작품은 한글전용으로 작품을 구상하고 완성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은 어떨까.

 

 



 

어느 때는 듣고 있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가지고 잘난 척하는 것 같아 우습기도 하고, 어느 때는 너무도자연스러워서우울해지기도 한다. 그것조차 잘 들어보면 쓰임이 완전히 틀리는 경우도 수두룩하다. 어제 만난 대기업 사보 기자의 애기를 예로 들어보자. 한비야 씨 책을 읽어보니 나이브(naive)한 것 같아 참 좋았어요.”그에게 다른 뜻이 없었다면 나에게 욕을 한 샘이다. 나이브라는 말은 순수, 순진하다는 긍정적인 뜻보다 경험이 일천하여 잘 속아 넘어갈 정도로 뭘 모른다는 부정적인 뜻이 더 크니까.

                                                                                          한비야의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중에서

 

 

 

 

 

지난 대선 JTBC와 한국정치학회 공동주최로 열린 4TV 토론에서 보수정당의 유씨 성을 가진 후보(그는 미국 위스콘신 대학교 경제학 박사이다)가 문 후보에게 영어 별로 안 좋아하니까 그런데 KAMD(한국형미사일방어체제)는 영어로 하시네. 코리아 패싱(Korea Passing)이라고 아시나요.”라 질문을 했다. 이에 문 후보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대답을 했다. 역시 미국에서 미제 물을 많이 처먹어서인지 정말 유식한 유씨 성을 가진 인간의 질문이었다.


 

 

 

대통령후보자 토론자리가 무슨 영어 토익시험장인줄 착각한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그렇게 영어를 잘하면 미국에 가 살면서 미국대통령후보로 나서지. 대한민국의 대통령후보라는 작자가 우리 한국말로 북핵 문제에 한국을 소외 시키는 현 정세를 어떻게 생각을 하십니까?”해도 될 것을 코리아 패싱(Korea Passing)이라고 할 이유가 뭘까? 나는 미제 물 많이 처먹었다고 미국놈에게 나는 당신들의 내시입네다. 라고 미국놈들에게 아부하는 것일까? 참으로 구역질나는 인간이다.

 

 

 

 

강대국의 틈새에 낀 약소국가라도 정체성과 주체성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저 미국의 주장을 물불 안 가리고 추종하는 인간들, 문 제인후보의 말처럼 부끄러운지 알아야 한다.” 코리아 패싱(Korea Passing)이라는 말보다 국민들이 알아듣기 쉬운 한국을 배제한” “한국을 소외한” “한국을 제외한” “한국을 무시한등등 우리말로 해야 국민들이 더 잘 알아듣는다. 코리아 패싱(Korea Passing)이라고 하니 어르신들이 잘 이해하실 수 있었을까? 어르신들이 많이 지지하는 정당인데, 그러니 낙선할 수밖에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긱이기는 하지만).

 

 

                                           (예전에는 생명을 살리는 식수원이었을  우물이 덩그러니 방치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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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장기에 있는 장기읍성이다. 장구한 세월의 흐름에도 그런대로 잘 보존이 되어있었으나 앞으로도 저 모습 그대로 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우리 것을 아끼는 마음에서 글과 함께하면 좋을 듯하여 올렸다.

 

이글 바로 앞에 올린 글도 우리의 글과 말에 대하여 올렸으나 비슷한 내용을 다시 올리는 것은 너무도 무변별 하게 난무하는 외국어에 대하여 한번쯤 생각을 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에서다.

 

이 바쁜 세상에 긴 글을 어느 분이 다 읽게는 가하는 생각도 아니해보는 것은 아니지만 단 한분이라도 읽으시고 주위에서 외국단어로 글을 쓰거나 말을 하는 것을 들을 때에 지적을 해 준다면 하는 바람에서다.

 

강원국의 대통령의 글쓰기206쪽에 저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스피치라이터! 우리말이 있으면 좋은데 딱히 없다. 연설문 대필자? 연설 작가? 좀 이상하다 그냥 스피치라이터가 좋겠다.”저자와 전화가 된다면 연설문 대필자가 왜 이상한가 묻고 싶다. 그러면 연설문 도우이라 하면 어떤가? 대통령의 연설문 작성을 도와주는 일을 하는 사람아닌가. 그러니 연설문 도우이가 아닌가.

 

우리말이 없으면 생각하여 외국어와 비슷한 뜻의 우리글로 문백이 이어지게 대신하면 되지 않을까? , 가사도우미라고 쓰는 단어를 직급이 높으신 스피치라이터의 체면에 어떻게 연설문 도우미라고 쓸 수 있게나 생각을 한다면 정말 한심한 사고방식의 소유자요, 일그러진 지식인의 초상이다.

답답한 마음에 촌부가 넋두리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