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담아두기

삶이란 화폭에 그대는 무엇을 그렸는가?

心田農夫 2019. 11. 23. 15:09

 


 

                           삶 그 자체는 중립적이다.

                       삶이 아름다워지고 추해지는 것은

                우리가 어떤 에너지를 갖고 사느냐에 달려 있다.


                                        오쇼 라즈니쉬의 중에서



                    테오도르 체리코, <이젤 앞의 젊은 예술가> 1812년경, 캔버스에 유화



고자(告子)는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에는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 않다는 성무선악설(性無善惡說), 즉 아무것도 그려있지 않은 백지와 같은 마음으로 태어나지만 살아가면서 선하게 살아갈 수도 때로는 그 삶이 악해질 수도 있다는 백지설(白紙說)을 주장했다. 즉 백지의 화폭에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도 추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이 그린다는 것이다.

 


                                쟝 바티스트 샤르댕, <왕립 예술원의 작품을 모작 중인 젊은 화가,

                                               1730년경, 캔버스에 유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생의 삶을 그리는 화가이다. 자신의 삶을 어떻게 그리든 오직 자신의 마음이다. 나는 나의 화폭에 교육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 교육 컨설턴트라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우리의 교육이 당연히 가야 할 길을 제대로 가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교육의 전문가가 되기로 마음을 정하고 나이를 잊고 과감히 교육대학원 교육컨설팅을 전공하는 학생이 되었다.



 

                             에드아르 마네, <에바 곤잘레스>, 1869~70, 캔버스에 유채.

 

 


주위의 반대도 많았다. 그 나이에 젊은이들을 따라가지 못하리라는 것이었다. 나 역시 과연 이 나이에 건강이 따라 줄까? 그리고 대학원 수학 과정 따라갈 수가 있을까? 등등의 여러 문제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일단 도전해 보자는 마음으로 참으로 어려운 결정을 하고 두려운 마음에 안고 시작을 했지만, 이제 그 고지를 앞에 두고 있다. 12월 말에 4학기를 마친다.

 


                                   얀 베르메르, <화가의 스튜디오>, 1665~70, 캔버스에 유채.


 

2019년도 이제 한 40일이 남았다. 블로그 친구 여러분, 올해 어떠한 그림을 여러분의 화폭에 그리셨는지요? 올해 만족할 만한 그림을 그리지 못하셨다면 앞으로 다시 주어질 2020년에는 어떠한 그림을 그릴지 그릴 그림의 구상하는 40여 일을 보람되게 보내시고, 자신이 보기에 아름답게 그렸다면 내년에는 더 멋지고 더 아름다운 그림을 이어나갈 그림을 그리시길 응원합니다.